창두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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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 = {{국기나라|티베트}}
|교전국2 = {{국기나라|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1 = {{국기그림|티베트}} [[응가포이응가포 응가왕 지그메]] ([[포로]])
|지휘관2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류보청]]<br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장궈화]]<br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판밍]]
|병력1 = [[티베트군]] 8,5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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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의 전개 ==
중국 인민해방군의 침공 이전에 [[캄]]과 티베트 정부와의 관계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때문에 캄은 티베트 정부를 반대했고 창두에서 일어난 중국 공산당의 행동에 가세했다. 인민해방군은 캄에서 어떠한 저항 없이 캄을 점령하게 된다. 판다창 랍가(Pandatsang Rapga)는 응가포이응가포 응가왕 지그메(Ngapoi Ngawang Jigme)에게 티베트 정부가 캄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에 몇몇 캄 출신 전사들을 저항에 참가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지그메는 이를 거부했다.
 
창두 전투 중에 랍가(Rapga)와 톱가이(Topgay)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협상에 참여했다. 캄 주민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해방군의 진행은 순조롭게 성공했다. 협상이 실패한 지 1개월 뒤에 티베트는 안전 보장을 위해 외국의 원조와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고 시도했으며 인민해방군과 티베트군 양측의 병력이 증강했다. 인민해방군은 1950년 [[10월 6일]] 또는 [[10월 7일]]에 [[진사 강]]을 넘었다.
 
압도적인 수를 갖고 있던 인민해방군의 2개 부대는 1950년 [[10월 19일]]에 티베트군을 국경에서 가까운 창두 주변에서 재빨리 포위했다. 이 과정에서 인민해방군 병사 114명, 티베트군 병사 180명이 사상했다. 활발한 전투는 가모응굴추 강(Gyamo Ngul Chu) 북동부, 티베트 정부가 관리하는 동경 96도 동쪽의 국경에 한정되어 있었다. 창두를 점령한 인민해방군은 교전을 정지했고 포로로 잡힌 응가포이응가포 응가왕 지그메를 라싸로 보내서 협상 조건을 다시 제시했다. 또한 티베트 정부가 베이징에 대표를 보내는 것을 기다렸다.
 
== 전투 이후 ==
인민해방군은 응가포이응가포 응가왕 지그메를 석방시켰고 라싸로 파견했다. 지그메는 달라이 라마와의 협상에서 인민해방군 대표로 참석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티베트가 평화적으로 해방된 경우에는 티베트의 상류층이 지위, 권력을 유지한다고 약속했다. 티베트는 협상을 위해 베이징에 대표를 보냈다.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는 베이징에서 [[십칠조협의]]를 체결했다.
 
[[분류:1950년 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