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사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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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사화'''(辛壬士禍) 또는 '''신임옥사'''(辛壬獄事)는 [[조선 경종]] 때인즉위 1년 후인 [[1721년]](경종부터 1년,다음 신축년(辛丑年))부터 [[1722년]](임인년(壬寅年))까지 일어났던 정치적 분쟁으로,당파인 [[연잉군노론]] [[왕세제소론]] 책봉하는 문제를 에워싸고 일어난 [[노론연잉군]] [[소론왕세제]] 싸움으로,책봉문제로 '''신임옥사'''(辛壬獄事)라고도충돌한 한다사건이다.
 
== 신축옥사 ==
[[조선경종은 숙종]]의몸이 뒤를 이은 경종은허약하고 아들이 없고 몸이 허약하였다없었다. 이에 노론의 주도로노론이 경종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였다. 이것이주장함에 관철되어따라 [[1721년]](경종 1년) 왕제(王弟) 연잉군(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책봉되었으며, 더 나아가 [[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 노론 4대신은 경종의 병을 이유로 왕세제의 대리청정까지 주장했다.주장하였고 경종은경종이 이를 승인하였지만,승인하였다.

이에 소론파의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煇) 등이 부당성을 상소하여상소함에 대리청정은따라 취소대리청정이 되었다. 소론은취소되었으며, 이 문제를 노론의 경종에 대한 불충으로 몰아 노론을 탄핵하였다.탄핵하였고, 이후 벌어진 [[목호룡]](睦虎龍) 고변사건(告變事件)으로을 일으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인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 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다. 이후 이 사건은 영조의 탕평책 추진 과정에서 계속 논란이 된다.
 
== 임인옥사 ==
그 후 소론의 [[김일경 (1662년)|김일경]]·[[목호룡]] 등이 [[1722년]](경종 2년) 음력 3월 임금을 죽이려는 역적이 있다고있으며, 고해목호룡은 바쳤다. 임금은 즉시 정국(庭鞠)을 열고 목호룡이 역적이라고 지적한역적이 [[정인중]](鄭麟重)·[[김용택 (문신)|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백망]](白望)·[[이홍술]](李弘述)·[[심상길]](沈尙吉)·[[이희지]](李喜之)·[[이명좌]](李明佐)·[[김성행]](金省行)·[[이세복]](李世福) 등 60여 명을명이라 고하였다.

이에 임금은 즉시 정국(庭鞠)을 열고 목호룡이 지목한 모두를 잡아들였다. 백망은 심문을중 백망은 당하면서심문 이것은도중 세력을 잃은 소론이 왕세제 연잉군을 모함하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심문을 담당하고담당한 있던 소론은소론이 이를 묵살했다. 이리하여묵살했으며, 이홍술·이천기·이희지·심상길·정인중·김용택·백망·[[장세상]](張世相)·[[홍의인]](洪義人)·이명좌 등이 이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 추후 ==
또한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신임사화가 무고무고였다는 였다는주장이 주장으로제기되면서 김일경과 목호룡이 함께 체포되었다.체포되었으며, 이로 이때인하여 소론 완론이내 계파 중 '완론'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으며되었고, '준론' 세력은 [[이인좌의 난]]으로 소론겪으면서 준론은숙청되었다. 사라졌다.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