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당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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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조]]의 건국부터 나라가 멸망까지에 21명의 황제(皇帝)가 통치한 290년 동안의 당나라 역사의 기록으로 5대 [[후진 (오대)|후진]](後晉)의 [[유후]](劉昫)가 일을 총괄하고 장소원 · 가위 · 조희 등이 편찬하고 조영이 감수하였다. 당나라 멸망 직후의 사료 부족으로 후반부는 부실하고 전반부도 선행의 여러 사료에서 발췌한 것이기 때문에 일관성이 부족하나 당대 원사료의 문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있다. 처음에는 『당서』라 했으나, [[송나라|송대]](宋代)에 『당서』를 다시 편찬하였기 때문에 『구당서』라 부르게 되었다.
 
== 개요 ==
완성 및 주상(奏上)은 후진 개운(開運) 2년([[945년]]) 6월로, 그 이듬해에 후진이 멸망하는 바람에 편찬책임자가 도중에 교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고, 덕분에 한 인물이 두 개의 열전으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거나 초당(初唐) 시기에 비해 만당(晩唐) 시기에 대한 기술이 다소 빈약하다는 등의 문제점이 제기되기도 한다. 때문에 후세의 평판은 좋지 않았고, 북송(北宋) 시대에 다시 《당서》(唐書)가 편찬되기에 이르렀다([[신당서]]). 그러나 거꾸로 당대 실록 등의 1차 사료의 원문들이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오히려 《구당서》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당시 일본열도에 대해 「왜국전」(倭國傳)과 「일본국전」(日本國傳) 두 열전이 입전되어 있는데,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그 나라가 해 뜨는 변두리에 있으므로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하였다. 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아름답지 않음을 꺼려서 일본이라고 고쳤다고도 하고, 일본은 예로부터 소국이었는데 왜국의 땅을 병합하였다고도 한다.」<ref>구당서 권199상(上) 열전 제149상 동이(東夷) 일본국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併倭國之地”</ref>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은 송대 초기의 《태평어람》(太平御覧)에도 인용되었는데 이 기록에 대해서는 편찬과정에서 존재했던 일본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다른 설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森公章은 「日本」이라는 국호 성립 이후에 최초의 견당사(遣唐使)가 파견되었던 [[702년]]에도 국호변경 사유를 일본측에서도 밝히지 않았고 견당사가 당측에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大庭脩는 이를 간단히 편찬 과정에서의 실수라기보다는 「왜국전」과 「일본국전」의 왜국(일본) 관련 기사의 중절된 시간대에는 [[백강구 전투]] 및 [[임신의 난]]이 있었으며 당시의 중국측에는 임신의 난에 의해 「왜국」([[덴지 천황]]의 정권)이 무너지고 「일본국」(덴무 천황의 정권)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존재했기에 이에 대해 확실하게 결론을 내지 못한 채 이설로써 모두 병기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 각주 ==
<references/>
 
{{위키문헌|zh:舊唐書|구당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