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 작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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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의 비극: 폭격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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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미도의 비극 ===
1950년 9월 10일 미 해병대 소속 항공기(리차드 루블(Richard W. Ruble) 제독의 해병대 항공단 제15 항모 전단 항공기.)들에 의한 폭격으로 인해 월미도 거주 민간인들이 집단 희생되었다.
[[파일:월미공원 입구 옆에 위치한 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 농성장.jpg|섬네일]]
오전 7시, 폭격기 편대는 월미도를 한번 정찰한 후 4대씩 짝을 지어 북쪽으로 갔다가 영종도 상공에서 다시 남쪽으로 빙 돌아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월미도 위에서 급강하해 마을 위를 지날 때 각자 네이팜탄 두 개씩을 떨어뜨렸다. 첫 네이팜탄은 마을 한가운데의 초가집에 떨어졌다. 이내 거대한 화염과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연기가 너무 자욱했기 때문에 폭격기들은 섬 주위를 선회하며 연기기가 걷히기를 기다렸다가 시야가 확보되면 다시 저공비행 상태에서 불타지 않은 건물들에 로켓포와 기관총을 쏘았다. 건물들이란 마을의 집과 창고 따위였다. 이러한 패턴의 폭격이 12시 전후까지 3차례 실시되었다.<ref>{{서적 인용|url=|제목=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 작은 섬 월미도가 겪은 큰 전쟁들|성=강|이름=변구|날짜=2017년 9월 10일|출판사=서해문집|확인날짜=}}</ref>
마을 주민들은 9월 10일 7시 첫 폭격이 시작되자 곧바로 마을을 빠져나와 인천으로 연결되는 다리쪽 갯벌로 피신했다. 그러나 폭격기들이 피신해 있거나 다리를 통해 인천으로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주민들은 몸에 진흙을 바르고 죽은 척 엎드려 있으면서 추가 공격을 모면했다. 그러다가 폭격이 뜸해진 틈을 타 갯벌을 걸어서 인천으로 대피했다.
폭격은 인천상륙작전의 사전 작전으로 실시되었다. 목적은 월미도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 진지를 소탕하는 것이었다. 마을까지 폭격한 이유는 그곳에 적 병령과 무기가 은닉되어 있다가, 아군이 상륙했을 때 기습 공격을 당할 수도 있는 작전상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민간인 거주 지역임을 미군이 알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직전까지 미군이 월미도에 주둔했기 때문이다.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미군은 월미도를 손바닥 보듯이 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날 폭격으로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가 10명이고, 실종자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가 1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진실 화해 위원회는 추산했다. <ref>{{웹 인용 |url=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465999.html |제목=인천 상륙 작전 피해 월미도 주민들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저자=김영환 |출판사=한겨레 |날짜=2011.3.1 |확인 일자=2013-11-07}}</ref>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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