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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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공작의 아들로,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최초로 [[독일 국왕]]에 선출된 [[루돌프 1세]]의 5대손이자 그 아들 [[알브레히트 1세 (독일)|알브레히트 1세]]의 4대손이었다. [[바이에른 왕가]] 출신의 [[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제국)|루트비히 4세]]는 5대조 [[루돌프 1세]]의 외손자였다.

1424년 9살의 어린 나이에 이너와스터라이히를 상속받게 된다. 1439년 24세에 합스부르크 가의 최고 서열이 된어 이듬해 친척이자 독일 왕인 [[알브레히트 2세 (독일)|알브레히트 2세]]가 서거하자 독일왕에 선출된다. 이후 친척들과의 갈등과 제후들의 반란에 시달렸고 그와중에 전왕의 아들이자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인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그가 가진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계승권을 노리려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귀족들의 반항으로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라디슬라우스의 후견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계속되는 오스트리아 귀족들의 반란, 독일 제후들과의 분쟁, 정부 개혁을 추진할 수 없는 무능력으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독일의 정사에서 완전히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이는 제국 내의 불만을 더욱 부추겨 1436년부터 대립각을 세운 친동생인 알브레히트 6세를 포함해 수많은 왕위 주장자들이 등장화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며 1446년 알브레히트 6세는 전방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는 교회와 다소 완만한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1452년 37세의 나이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롬바르디아]]의 왕관을 받았고 그와중에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라]] 공주와 결혼을 했다. 3월 19일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 왕관을 받아 정식으로 신성로마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