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손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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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히라가 히라이즈미 주손지의 중흥(사실상의 창건)에 착수한 것은 조지(長治) 2년([[1105년]]), 그의 나이 50세 되던 때였다. 이때 건립된 절집은 「사이초인」(最初院) 또는 「다호지」로 불리며, 법화경(法華経)「견보탑품」(見寶塔品)에 나오는 다보여래와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건축 양식 등의 상세한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곤지키도의 상량(上棟)은 서까래에 적힌 묵서명에 따라 덴지(天治) 원년([[1124년]])으로 판명되었다. 이 곤지키도는 기요히라가 자신의 묘당(廟堂)으로 쓰고자 세운 것으로 내부의 수미단(須弥壇) 안에는 기요히라와 그의 아들, 손자에 이르는 3대의 유해가 [[미이라미라]]로써 안치되어 있다.
 
히라이즈미는 오슈 후지와라 씨의 4대 100여 년에 걸치는 지배 아래서 헤이안 왕조풍의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고, 기요히라 사후 아들 모토히라 부처(夫妻)도 모쓰지(毛越寺)와 관자재왕원(観自在王院)을 세웠고, 손자 히데히라는 무료코인(無量光院)을 세웠다고 전하나, 당시의 모습대로 현대까지 전해지는 것은 주손지 곤지키도와 모쓰지의 정원, 감지금은자경(紺紙金銀字経) 등의 유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