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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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영토 문제로 루이 7세와 수십년간 다투었는데 숱한 평화 회담과 많은 조약을 체결했는데도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으면서도 헨리 2세는 [[브르타뉴]]를 차지해 동으로는 중부 프랑스, 남으로는 [[툴루즈]]까지 지배권을 확장하는 일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에서 다양한 사법 체계 개혁을 추진해 미래 잉글랜드 법을 정초했고 왕실 재정과 통화를 재정비하였다. 잉글랜드 교회와 꽤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교회에 대한 왕권 지배 문제와 조직 개편 문제로 친구였던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1160년대 내내 계속 반목했고 버켓은 [[1170년]]에 결국 살해됐다.
 
엘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가 태어났으나 만년에 들어서면서 복잡한 자신의 영토을 대상으로 한 상속 문제로 아들들과 갈등했고 여기에 아들들을 대상으로 한 엘레오노르의 충동과 루이 7세와 그 사람의 아들인 [[필리프 2세 (프랑스)|필리프 2세]]의 이간 정책까지 겹치면서 크게 고통받았다. [[1173년]] 장자인 '[[젊은 헨리]]'가 불만을 품고 반역하자 동생인 [[리처드 1세|리처드]]와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제프리]]와 엘레오노르까지 합류했고 프랑스, 스코틀랜드, 플랑드르, 불로뉴까지 헨리 2세에게 대항했다. [[1173년]]에서 [[1174년]]까지 대반란은 헨리 2세의 영토 전역으로 비화했으나 헨리 2세의 군사력과 지역 영주들이 도운 덕분에 진압되었다. 승리한 헨리 2세는 관용을 베풀면서 자신의 위세를 높이려고 했으나 승리는 일시였고 아들들은 여전히 반항했다. [[1183년]] 제프리는 재반란했으나 실패하고 죽었다.
 
막내 아들 [[존 (잉글랜드)|존]]을 아꼈던 헨리 2세는 존에게 물려줄 영지를 구하고자 아일랜드를 침공할 정도였으나 존은 그 정도로는 불만족했다. 아버지인 헨리 2세가 존에게 왕위를 물려줄까 우려한 리차드는 필리프 2세와 연합하여 [[1189년]]에 흥융했고 헨리 2세가 아끼던 존마저 리처드에게 가담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헨리 2세는 앙주로 은퇴하였고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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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르망디 공작과 앙주 백작 시절 ===
1150년 은퇴한 마틸다에게 노르망디 공작 칭호을 상속받고 1151년 아버지 조프루아가 죽자 앙주 백작을 계승하였다.
 
[[1152년]] 노르망디 공작에 오르고서 얼마되지 않아 프랑스 왕 [[루이 7세]]의 전처였던 아키텐 여공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엘레오노르]]와 혼인하면서 엘레오노르에게 막대한 지참금으로서 [[푸아티에]], 기엔, [[가스코뉴]]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혼인에서 자식 여덟 명([[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윌리엄]], 헨리, 리처드, 제프리, 존, 마틸다, 엘리오노르, 조안)을 슬하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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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토 확장 ===
1171년 아일랜드를 병합하고 [[1173년]]에는 [[스코틀랜드]]전에서 이겨 잉글랜드 국력을 신장하게 했다.
 
=== 행정·사법 제도 개혁 ===
즉위 직후 세출 파악에 나서 재정 정비와 조세제도를 꼼꼼히 기록하고 지출 수납 통제를 세심히 신경 썼다. [[1166년]], 헨리 2세는 배심제를 도입하였으나 왕권 강화를 중시했던 그 사람은 교회 사법권을 두고 캔터베리의 대주교 [[토머스 베켓]]과 반목했다.
 
1166년 말 배심제 정비에 매진하기 시작해 성직자와 귀족들의 범죄행위와 월권을 단속하겠다고 선포했다. 이전 [[1164년]]에도 헨리 2세는 성직자의 범죄를 교회 법원뿐만 아니라 세속 법원에서도 재판 가능한 [[클라렌던 헌장]]을 제정하려 했다. 헌장에는 교회에서 제멋대로 재판하는, 교회 재판권 금지 조항을 추가하였다. 베켓이 이끄는 주교단은 이 법이 일사부재리 원칙을 위반한다면서 격렬히 반대했고 시골 백성을 배려한 순회재판소 확충과 문자 교육을 장려했다.
 
[[1170년]] [[12월 29일]], 기사 네 명이 헨리 2세의 환심을 살 속셈으로 캔터베리에서 베켓 대주교를 죽였다. 전설을 좇으면, 기사 네 명은 헨리 2세가 분노하여 ''"이 몹쓸 대주교를 없앨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하는 고함을 듣고서 베켓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인망이 높던 토머스 베켓이 교회당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하자 헨리 2세는 비난에 시달렸고 헨리 2세 자신도 정치시상 이유로 대립하였으나 깊이 존경하던 베켓이 살해당해서 괴로워했다. [[1173년]] 베켓은 시성되었고 익년 [[1174년]] 헨리 2세는 토머스 베켓의 무덤 앞에서 참회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용병과 민병으로 구성된 국왕 친위대를 창설하여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였다.
 
=== 아들들과 갈등 ===
만년에 헨리 2세는 왕위를 막내 아들 존에게 물려주려 했지만, 그것을 안 셋째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리처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내통하여 아버지인 헨리 2세를 공격했고 산으로 쫓겨나간 헨리 2세는 막내 [[잉글랜드의 존|존]]에게 도와달라고 하려고 했으나 존은 형인 리처드의 편이 되었다.
 
막내 아들 [[존 (잉글랜드)|존]]을 아꼈던 헨리 2세는 존에게 물려줄 영지를 구하고자 아일랜드를 침공할 정도였으나 존은 그 정도로는 불만족했다. 아버지가 존에게 양위를 우려한 리차드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연합해 [[1189년]]에 흥융했고 헨리가 아끼던 존마저 리처드에게 가담하자 충격받은 헨리 2세는 [[1189년]] 결국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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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133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