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161년생인 유비보다 일찍 태어난 것은 근거있는 사실이니 160년 이전에 태어났다는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
태그: m 모바일 웹 |
||
22번째 줄:
대대로 이천석 관직을 역임한 유력 가문이었는데 [[어머니]]가 천했기에 [[요서군]]의 문하서좌(門下書佐)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용모가 수려하고 [[목소리]]가 컸으며 말재주도 있는데 총명하기까지 하여 매양 수 개 조(曹)의 일을 한꺼번에 보고하면서도 잊거나 틀린 부분이 없었다.<ref>어환, 《전략》(典略) ; [[배송지]] 주석, 《삼국지》8권 위서 제8 공손찬에서 인용. [[이현 (당)|이현]]도 《후한서》73권 열전 제63 공손찬에 주석하며 인용</ref> [[태수]]가 기특하게 여겨 사위로 삼고는, 구씨산(緱氏山)에 있던 [[탁군]] [[사람]] [[노식]]에게 보내 경전을 배우도록 했다. 여기서 [[유비]]와 동문수학하며 깊이 교우하였다.<ref>《삼국지》32권 촉서 제2 선주 유비</ref> 이후 [[군 (행정 구역)|군]]의 상계리(上計吏)로 근무하였다.
장인의 후임 태수<ref>공손찬을 사위로 삼은 태수의 앞 [[글자]]는 《삼국지》의 판본에 따라 侯(후)와 故(고)가 있다. 태수의 성씨가 후씨일 수도 있고, 그저 옛 태수란 뜻일 수도 있다. 어쨌든 유기는 공손찬의 장인과는 다른 사람이다.</ref> 유기(劉基, 劉其)<ref>劉基는 《[[태평어람]]》
=== 북방 이민족과의 혈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