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칙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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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칙서는 영국 상인들로부터 차와 교환한 아편에 석회를 묻혀 바다로 폐기해 버렸는데(아편은 석회와 소금을 만나면 화학 반응이 일어나 못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치에 분노한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에게 항의하였고, 결국 [[아편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현지의 영국 상인을 지원하기 위해서 파견된 영국의 동양함대는 [[광둥]]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가까운 [[톈진]]에 출몰하였다. 바로 코 앞에 닥친 함대를 맞이한 청의 지도부는 당황하며 임칙서를 해임하였고, 영국에 저자세로 대처하였다. 임칙서의 후임 [[보르지기트 키샨|기선]](琦善)은 오로지 영국에 저자세로 일관하였고, 그 결과 청나라가 대폭 양보한 [[난징 조약]]을 맺게 된다.
 
[[1840년]] 흠차대신에서 해임된 임칙서는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신장]]으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 운귀 총독을 지냈다. 그러나 임칙서는 여기서 선정을 펴서 주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임칙서에게 있어서도 이 곳에서 남하하는 [[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실제로 살필 수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으며, 진사 후학들에게 「장래 청나라의 최대의 위협은 영국보다 러시아일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훗날 [[좌종당]] 등이 새방파를 형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