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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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설명|[[펠리페 2세 (동음이의)]]}}
{{왕족 정보
|이름 = 펠리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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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왕으로서는 카를로스 1세)와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딸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다. 1556년에 펠리페 2세는 부왕 카를로스 1세로부터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영토와 더불어 막대한 빚까지 물려받았으며, 다음해인 1557년에 최초의 파산 선고(국고 지불정지 선언)를 하기에 이른다. 그의 치세 동안 총 네 차례의 파산 선고를 실시했다는 점을 볼 때 당시 펠리페 2세 시대의 어려운 국고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쟁]]에서는 1559년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요구를 묵살하였다.
 
펠리페 2세는 [[아라곤 왕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총독을 파견해 제국 전체를 통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하였다. 1561년,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이유로 왕국의 수도를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그리고 1563년 마드리드 교외의 시에라 드 구아다라마 언덕에 [https://namu.wiki/w/%EC%97%98%20%EC%97%90%EC%8A%A4%EC%BD%94%EB%A6%AC%EC%95%8C [엘에스코리알 궁전]]을 착공, 1584년에 완공하였다.
 
부왕과는 달리 그는 거의 궁정에 틀어박힌 채 열심히 정무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서류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가 만들어낸 서류 결제 체제는 당시 [[유럽]]에서는 선진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지만, 그가 죽은 후 스페인 왕국에서 이 체제를 도입한 위정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