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박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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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전한)|원수]] 4년([[기원전 119년]]), [[우북평군|우북평]][[태수]] 노박덕은 [[곽거병]]을 따라서 [[흉노]] 정벌에 참여하였고, 이때의 공으로 부리후(符離侯)<ref>이는 《[[사기 (역사서)|사기]]》의 기록으로, 《[[한서]]》에서는 '''비리후'''(邳離侯)라고 한다.</ref>에 봉해졌다.
 
[[원정 (전한)|원정]] 5년([[기원전 112년]]), [[위위]] 노박덕은 복파장군(伏波將軍)<ref>전한 최초의 복파장군이다.</ref>에 임명되어 [[남월]] 정벌에 참여하고 이를 평정하였다. 이듬해에는 [[하이난 섬|해남도]](海南島)를 공략하여 [[주애군|주애]](珠崖)·[[담이군|담이]](儋耳) 2개군을 설치하였다.
 
이후 법에 걸려 작위가 박탈되었고, 강노도위(彊弩都尉)에 임명되어 거연(居延)에 주둔하던 중 죽었다주둔하였다.
 
[[천한 (전한)|천한]] 2년([[기원전 99년]]), [[기도위]] [[이릉]]의 청을 받아들인 [[전한 무제|무제]]는 그에게 보병 5천 명을 주고 [[흉노]]의 [[선우]]를 유인하게 하는 한편, 노박덕으로 하여금 현지에서 이릉을 맞이하게 하여 후미를 따르게 하였다. 노박덕은 자신보다 경력이 한참 밀리는 이릉의 뒤를 따른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무제에게 글을 올렸다.
{{인용문2|가을에는 흉노의 말이 살져 있어,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봄까지 기다렸다가 [[주천군|주천]]·[[장액군|장액]]에서 5천 명씩 모아 준계산(浚稽山)에서 협공한다면, 선우를 반드시 사로잡을 것입니다.}}
즉, 노박덕은 봄에 이릉과 협공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제는 겁을 먹은 이릉이 노박덕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오해하여, 이릉을 질책하고는 홀로 준계산에서 정찰하도록 하였다.
 
노박덕은 강노도위를 지내다가 죽었다.
 
== 출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