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이고 천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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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타카하루 (尊治)
|별호 =
|연호 = [[분포 (연호)|분포]] (文保)<br />[[겐오 (연호)|겐오]] (元応)<br />[[겐코 (1321년)|겐코]] (元亨)<br />[[쇼추]] (正中)<br />[[가랴쿠]] (嘉暦)<br />[[겐토쿠 (1329년가마쿠라 시대)|겐토쿠]] (元徳)<br />[[겐코 (1331년)|겐코]] (元弘)<br />[[겐무]] (建武)<br />[[엔겐]] (延元)
|묘호 =
|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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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쿠후 타도 계획 ===
 
[[쇼추|쇼추(正中)]] 원년([[1324년]]) 4월, 고다이고 천황의 가마쿠라 바쿠후 타도 계획이 발각되고, 로쿠하라 단다이에 의해 천황의 측근 히노 스케토모(日野資朝) 등이 처분받는 사건이 일어난다.(쇼추의 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서 괴이한 점은 주모자 색출 과정에서 정작 최고 주동자였던 천황에 대해서 바쿠후는 어떠한 처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황은 이후로도 은밀하게 바쿠후 타도를 꾀하면서 다이고사(醍醐寺)의 승려 몬칸(文觀)이나 홋쇼지(法勝寺)의 엔칸(円觀) 등의 승려를 끌어들여, [[겐토쿠 (1329년가마쿠라 시대)|겐토쿠(元德)]] 2년([[1329년]])에는 중궁 사이온지 키시(西園寺禧子, 후지와라노 키시)의 순산 기도를 핑계로 은밀히 간토 조복의 기도를 행하면서 고후쿠사나 엔랴쿠사 등 난토(南都, 나라)의 지샤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다(다만 당시의 유력 권문이었던 사이온지 집안 소생의 친왕은 구니요시 친왕 계통에 맞설 유력한 황위계승자가 될 수 있었으므로, 실제로 순산 기도가 목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친(親)다이카쿠지통 계열의 귀족들은 원래 구니요시 친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지묘인통이나 바쿠후도 기본적으로는 그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천황은 점차 궁지에 몰렸다. 더욱이 구니요시 친왕이 병으로 훙거하자 지묘인통의 적자인 카즈히토(量仁) 친왕이 바쿠후의 지명으로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퇴위의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겐코 (1331년)|겐코(元弘)]] 원년([[1331년]]), 또 한 번, 천황이 주도한 바쿠후 타도 계획이 측근 요시다 사다후사(吉田定房)의 밀고로 발각되면서 천황의 신변에 위험이 닥쳤다. 위기 앞에서 천황은 교토 탈출을 결단, 마침내 삼종의 신기를 가지고 거병한다. 처음에는 히에이 산으로 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사기(笠置) 산(지금의 교토부 소우라쿠군 카사기쵸 내)에서 농성하며 군사를 모았으나, 바쿠후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서 결국 이듬해 성은 함락되고 천황은 사로잡혔다.(겐코의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