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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견을 적으면 못 쓰지 이 사람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 11일부터 [[1925년]] 3월 23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ref name="ReferenceA">이현희, 《광복 전후사의 재인식》 (범우사, 1991) 214페이지</ref>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미국]] 및 [[스위스]] 등을 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내막기]]를 저술하는 등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 (호칭)|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 [[김구]]·[[조소앙]]·[[김성수 (1891년)|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대통령 임기중 [[의무교육]]으로 문맹율을 획기적으로 낮추었고,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으로 전환시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한국전쟁|6.25전쟁]]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적화통일]]을 막아냈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이후 대한민국 번영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대통령직선제]] 발췌개헌과 [[1954년]]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와 국가주의경제조항을 시장경제조항으로 바꾸는 [[사사오입 개헌]] 등 민주적 절차를 흠결한 두 차례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을 3회 역임하였다. [[1960년]]에 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에 의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미국]] [[하와이 주|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장으로 집행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 대통령이 되기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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