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프 트로츠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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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셰비키]] 혁명가이며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그의 사상을 따로 일러 [[트로츠키주의]]라고 한다. 보통 레프의 영어식 이름을 따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뜨로쯔끼'''라고도 부른다. 트로츠키는 필명이며, 본명은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llang|ru|Лев Давидович Бронштéйн}})이다.
 
초기에는[[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 대회에서 [[멘셰비키]]였다가였으나 [[1904]] 결별하고 [[1917년]] 7월 [[볼셰비키]]로 전환, [[10월혁명]]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당의 지도자 중 하나로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했다. 초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붉은 군대]]의 창립자이다.
 
레닌의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과 이론적인 차이가 생겨 권력투쟁을 하게 되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튼튼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든후,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트로츠키의 세계혁명이론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지식인<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2101&yy=2013</ref>들과 혁명가들에게 혁명이론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그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인민의 적'으로 몰려 소비에트 연방에서 쫓겨나게 되어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말년에 [[멕시코]]에서 거주했으나, 스탈린이 사주했다고 여겨지는사주한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피켈로 살해당했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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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부유한 농가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98년]] 남부 노동자 동맹을 조직했다가 체포돼 [[시베리아]]로 유형당했다가 [[1902년]] 탈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데사]] 감옥의 "'트로츠키"'라는 간수의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한 것을 계기로 트로츠키는 평생 이름이 되었다. 그 뒤 [[런던]]에서 혁명가 [[레닌]]과 처음 만났다. 초기에는 레닌의 훌륭한 조력자로 "'레닌의 곤봉"'이라는 별명까지 얻지만, 곧 [[레닌]]의 냉혹한 노선에 실망해 [[멘셰비키]]에 가담함으로써 레닌과 오랜 반목이 시작된다.
 
[[1905년]]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이 된후 다시 체포되지만 곧 탈출한다. 이후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통합을 도모하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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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레닌이 사망한 뒤, 트로츠키와 스탈린은 당의 노선을 두고 본격적으로 대립한다. 트로츠키는 중공업 노선을 위주로 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동반한 [[영구혁명론]]을 주장했고,<ref>[http://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23/04/industry.htm 트로츠키의 산업론]</ref> 스탈린은 경공업을 위주로 한 정책과, 서구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도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라는 ‘일국사회주의론’을 주장했다.<ref>{{서적 인용|제목=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Forging Democracy)|장=16. 스탈린주의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일국 사회주의 |쪽=457 |저자=[[제프 일리]] |출판사=뿌리와이파리|확인일자=2014년 1월 19일}}</ref> 그러나 스탈린도 트로츠키의 중공업 노선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느껴, 경공업 노선을 폐지하고 중공업 노선을 확고히했다. 소련의 지식인들 대다수는 레온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지지했으나,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은 소련 인민계층 대다수가 지지하게 되었다.<ref>[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8031 일국사회주의론에 대한 당시 소련 구성원들의 인식]</ref><ref>당시 레닌주의 구조상 권력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상향식 선거로 인민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야 했음.(레닌 저, 《무엇을 할 것인가?》 참조)</ref> 때문에 권력 투쟁에서의 우위는 스탈린이 쥐게 되었고, 스탈린은 10월 혁명 당시 트로츠키의 역할을 축소 왜곡하고 [[트로츠키주의]]를 [[레닌주의]]에 적대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등 갖은 날조와 중상으로 트로츠키를 고립시킨다.
 
레닌은 생전 트로츠키에게 [[영구혁명론]]이 말은 그럴듯 하지만 현재 소련 현실에는 좀 맞진 않다고 누차 지적했다. 결국 [[1927년]] 트로츠키는 당에서 제명당하고 [[1929년]] 국외로 추방된다.
 
=== 망명과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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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강연과 칼럼을 통해 [[이오시프 스탈린]]의 우상화와 폭력성, 다른 사상이나 의견을 수용할줄 모르는 편협성을 지적하였고, 그의 사상이나 정치 활동이 [[마르크스주의]]의 인간본위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곳곳에 설치된 스탈린을 기념하는 상징물과 찬양 작품 등의 스탈린의 개인 우상화 역시 비판하였다.
 
[[1936년]]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대적인 [[대숙청]]으로 가족과 거의 대부분 측근을 차례로 잃은 트로츠키는 해외로 도피와 망명을 거듭했으나 [[로버트 하트]]란 미국인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을 겪고 [[1940년]]부터는 [[멕시코]]에서 생활하였으며,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와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에서 숨어지냈다. 그러나 그해 [[8월 21일]]에 트로츠키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멕시코]]의 [[스탈린주의]]적 [[공산주의|공산주의자]]인자인 [[라몬 메르카데르]]에 의해 등산용 피켈(암벽등산용 곡괭이)에 머리를 찔려 암살당했다.
 
그때 즈음, 이미 죽음을 예감한 트로츠키는 [[1940년]] [[2월 27일]]에 유언장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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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권력을 잃은 후부터 죽은 이후 [[공산국가]]에서는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말은 곧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수정주의]]자', '반동주의자'를 의미하는 가장 심한 욕이자 한번 얻으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국제적 냉전 구도의 폐해가 현지인들의 생사를 가늠할만큼 심각하였으며, 공산당 일당 체제가 대중주의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해질수록, 대중의 '견강부회' 정도도 역시 심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볼세비키 집권 이후, [[NKVD]]의 숙청에 의해서 처형된 종교인, 내국인, 이민족 구성원의 희생자수가 1200만명이라는 추정치가 존재하는만큼, 공산당의 관료주의 역시, 마땅한 '자아 비판' 능력을 상실하였음을 반증하는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들어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부하린]] 등 과거의 고참 볼셰비키들이 복권되는 과정에서도 트로츠키는 결국 복권되지 못하였으며 소련과 별로 인연이 없던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북한]] 등에서도 '뜨로쯔키주의자'라는 표현은 '종파주의자'라는 등 심한 욕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사후 저서 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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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인용집|트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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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와 비판 ==
{{부분 토막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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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
* <나의 생애>(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