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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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일가는 어린 시절부터 그가 성직자의 소질을 타고났다고 증언하였다. 꽃을 뿌리며 뮌헨 대교구장이었던 [[추기경]]의 방문을 환영한 아이들 무리에는 다섯 살 무렵의 라칭거도 있었다. 당시 추기경 특유의 의복을 본 후로 그는 추기경이 되고 싶어 했다고 나중에 회고하였다.
 
=== 나치 전력 논란 ===
1941년 열네 번째 [[생일]]을 보낸 그는 곧바로 [[히틀러 유겐트|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했다. 그의 나치 소년단 가입 전력은 뒷날 교황 선출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1939년 12월 이후로 [[나치 독일]]의 모든 열네 살짜리 사내아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단체에 강제적으로 가입해야만 했다. 매우 엄격하고 정직했던 그의 아버지는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였으며, [[나치즘]]의 강력한 반대자였다. 1941년 라칭거의 사촌 가운데 한 명이 [[다운 증후군]]에 걸렸는데, 어린 나이였음에도 히틀러 정권의 [[우생학]] 운동에 의해 살해당했다. 1943년 열여섯 살의 그는 항공기 엔진을 만들던 BMW 공장의 방공포 부대에 복무하였다. 그는 그러나 손가락에 생긴 염증으로 연합군 항공기에 방공포를 발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부인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 라칭거는 1944년 4월 [[독일 연방군|독일군]]을 [[탈영]]해 집으로 돌아가다가 [[미국의 군사|미군]]에 포로로 잡혀 몇 주 동안 전범수용소에 수감돼 있다가 1945년 6월 전쟁이 끝나고 나서 몇 달 뒤에 석방되었다. 그해 11월에 그는 형 게오르크와 함께 신학교에 들어갔다.
 
1945년 두 형제는 트라운스타인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하였다. 두 사람은 [[1951년]] [[6월 29일]] 사제로 [[성품성사|서품]]받았다. 라칭거는 1953년과 1957년에 각각 《성 아우구스티노의 교회론에서의 유다 민족과 하느님의 집》이라고 명명된 논문과 [[보나벤투라|성 보나벤투라]]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덕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1958년 [[프라이징]]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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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
2012년 3월 26일~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쿠바]]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방문 마지막 날인 28일 하바나 혁명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쿠바와 세계는 변화가 필요하지만 이것은 각자가 진실을 추구하고 화해와 우애가 싹트는 사랑을 선택할 때 가능하다”며 “진실은 인간이 항상 진정한 자유를 탐색하게 하는 욕망”이라고 말했다. 쿠바의 통상 금지 조치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경제 조치로 국민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줬다.”고 지적했다. 교황의 이러한 발언은 아메리카 대륙에 하나 남은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에서 정치적 개방을 요구하는 자들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미사 직후 [[피델 카스트로]]와의 비공개 만남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12032910168272634&outlink=1|제목=교황 베네딕토 16세, 50만 군중 앞에서 '쿠바 개혁 개방' 촉구|날짜=2012-03-29|출판사=머니투데이|확인일자=2012-03-29}}</ref>
 
== 성추문 사건 은폐 의혹 ==
2002년 미국 보스턴 대교구에서 시작돼 전역으로 확산된 미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들에 대한 성학대로 교구가 파산하는 등 바티칸에 충격을 안긴 데 이어 2009년 11월에는 아일랜드 정부조사단의 가톨릭 사제들의 성추문 보고서는 ‘폭로 도미노’를 일으켰다. 아일랜드 정부는 보고서를 통해 1975년부터 2004년까지 가톨릭 성직자에 의한 성적학대 피해사례 320건을 공개했다. 정부의 공식 조사라는 점과 300건이 넘는 피해 규모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1996년 추기경 재임 당시 이러한 성추문 사건을 알고도 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성직자에 의한 성추행 피해자를 지원하는 인권단체인 SNAP (‘성직자에 의한 성추행 피해자 네트워크’(Survivors Network of those Abused by Priests , SNAP)는 2011년 가톨릭 성직자들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베네딕토 16세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60101033232023002
|제목=고난의 십자가 짊어진 바티칸 나치부역·돈세탁·성추문… ‘스캔들 릴레이’에 교황청 신뢰 추락
|날짜=2012-06-01
|출판사=문화일보
}}</ref>
미국 뉴욕의 헌법권리센터(CCR)와 성직자에 의한 성추행 피해자 단체인 SNAP는 2011년 9월 13일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교황청 국무장관, 안젤로 소다노 전 국무장관, 윌리엄 레바다 신앙교리성장관을 ICC에 제소했다. 80쪽에 달하는 고발장과 함께 가톨릭 성직자의 성범죄 관련 언론 보도 및 정부 기록 등 2만쪽 분량의 문서도 함께 증거물로 제출됐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성직자에 의한 성적 학대가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자행됐다"며 "교황은 전세계에서 행해진 강간과 여러 형태의 성적 폭력 등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팜 스피스 CCR 변호사는 "대부분이 어린이인 수만 명의 피해자에 대한 범죄가 교황청 최고 성직자들에 의해 은폐되고 있다"며 "정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비꼬았다.<ref>{{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2179428
|제목=반인륜 범죄 혐의 고발 당한 교황
|날짜=2011-09-14
|출판사=한국일보
}}</ref>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문은 미국이나 아일랜드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벌어졌는데 특히 베네딕토 16세가 추기경으로 있었던 독일의 교구에서도 일어났다. 독일의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100여 명의 가톨릭 성직자와 사제들이 1995년 이래로 독일 전역에서 아동 성추행을 벌였다는 의혹을 담은 기사를 내보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베네딕토 16세의 형인 게오르그 라칭어 신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겐스부르크 성당 성가대를 1964년에서 1994년까지 30년간 이끌었다. 문제는 이 성가대 운영을 맡았던 두 명의 신부가 성추행에 연루되어 사법적 처벌을 받은 바 있다는 것. 또한 베네딕토 16세가 뮌헨 추기경으로 있었던 1980년, 실제로 소년들을 성추행한 신부에게 병원 치료를 받게 한 후, 다시 복직시켜서 추가적인 성추행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티칸 대변인 론바르디 주교는 “이 문제에 교황은 책임이 없다”라고만 발표하고 더 이상의 논평을 하지 않았다.
<ref>{{뉴스 인용
|url=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880
|제목=교황과 바티칸까지 들쑤시는 신부님들의 ‘부끄러운 이야기’
|날짜=2010-04-13
|출판사=시사저널
}}</ref>
 
== 중도 사임 의혹 ==
2013년 2월 11일,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연령이 너무 많아 업무 처리가 힘들어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에 대해 정통한 전문가들은 베네딕토 16세의 중도 사임은 [[바티리크스]] 문서의 폭로가 결정적 계기로 보고 있다. 교황의 집사인 파올로 가브리엘레는 교황이 폐기하라고 준 비밀문서들을 보관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이탈리아의 기자 잔루이지 누치에게 전달했다. 누치는 이 문서를 토대로 <교황 성하 :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비밀편지>라는 책을 출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교황의 비밀편지에는 파벌간의 경쟁, 배신, 부패, 구조적 모순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고 전했다. 가브리엘레가 폭로한 비밀편지들에는 2011년부터 시작된 교황 반대파의 교황파에 대한 음해공작과 이에 항의하는 교황파의 입장이 담겨있었다. 집사 가브리엘레는 비가노 주교의 탄식에 동조하면서 교황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내부고발자' 역할을 자임했다. 가브리엘레는 교황청 사법당국에 의해 '문서 절도죄' 등 최대 8년형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는 혐의로 기소됐지만 불과 2개월 뒤에 교황에 의해 사면됐다. <ref>{{뉴스 인용
|url=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4597
|제목="교황은 얼굴마담, 교황청 주인은 따로 있다"
|날짜=2013-02-19
|출판사=프레시안
}}</ref>
 
== 관련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