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치데 데 가스페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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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토]]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트렌토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 [[빈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가톨릭 액션]]에참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트렌토 지방의 이탈리아 귀속을 위한 노력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트렌토 지방은 이탈리아로 편입되었으며, 그는 1919년 이탈리아 인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21년]] 이탈리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인민당이 [[아체르보 법]]을 지원하여 뭇솔리니의 집권을 도와준 후 인민당은 해체된다. [[1927년]] 그는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으나 [[바티칸]] 정부의 개입으로 석방되었으며, 그 후 바티칸 도서관에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계속하여 [[베니토 무솔리니|무솔리니]]에 반대하는 운동을 했으며, 인민당을 기독교민주당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43년]] 기독교민주당이 합법화되고 그도 정계에 복귀했으며, 전쟁 후 임시정부에 참가, 무임소장관과 외무장관을 지냈고 기독교민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1945년]]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국민투표로 왕정 폐지가 결정되어 [[1946년]] [[6월 12일]], 왕제가 폐지되면서 [[움베르토 2세]]가 폐위되자 [[엔리코 데 니콜라]]가 새 국가 원수로 선출될 때까지 잠시 국가원수를 겸하기도 했다.

[[사회당]], [[공산당]]과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연합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다가 [[냉전]]이 격화되자 [[1948년]] 선거 후 사회당·공산당을 연정에서 배제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마셜 플랜]]을 통해 상당한 원조를 받아 전후 이탈리아 경제 발전에 큰 원동력이 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유고슬라비아]]와의 사이에 분쟁이 있던 [[트리에스테]] 지역 일부를 되찾았다.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 원년 멤버로 참여했으며, [[1951년]] 오늘날의 [[유럽 연합]]의 전신인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 창설에도 관계했다. [[1953년]] 총선에서 기독교민주당은 계속 최다 의석을 확보했으나, 그는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그 다음해부터 [[유럽 의회]] 의장을 맡다가 [[8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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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총리}}
{{유럽 의회 의장}}
{{전거 통제}}
{{토막글|정치인|이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