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양 (제애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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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전한 혜제|혜제]] 7년([[기원전 188년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 이듬해 여후가 사망한 후, 여씨 제애왕은 여씨 일족이 감시역으로 파견한 승상 소평(召平)을 공격해 자살로 내몰고 외척 사균(駟鈞)·[[광록훈|낭중령]] 축오(祝午)·[[집금오|중위]] 위발(魏勃)과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낭야왕 [[유택]]을 속여 유택의 군사를 빼앗고 여나라 땅인 제남군을 공격하고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을 규탄하는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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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조정에서는 상국 [[여산 (사람)|여산]]이 [[대장군]] [[관영 (전한)|관영]]을 파견해 토벌하려 했지만 관영은 여씨 일족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여씨일족들이 득을 보는 것이라 생각해 형양(滎陽)에 주둔하고 제왕을 비롯한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이 타도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공문을 보냈기 때문에, 제애왕은 국경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여산·[[여록]] 등의 여씨 일족은 주허후와 [[주발]]·[[진평]] 등에게 죽었다. 대신들은 다음 황제를 누구로 하는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제애왕의 어머니의 친정인 사(駟)씨 가문이 악인들이라는 이유로 제애왕은 선택되지 않고 대신 고조의 넷째 아들인 [[대 (전한)|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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