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양 (제애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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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전한 혜제|혜제]] 7년([[기원전 188년|기원전 188]]), 부친 유비가아버지 사망하자제도혜왕이 제왕죽고 작위를 이었다. 당시는 [[고황후|여후]]가 태후, 태황태후로 임조칭제하며 권력을 잡고 있었다.

여후 원년([[기원전 187년|기원전 187]]), [[여태]]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제남군]]을 여나라 봉토로 헌납했고, 여후 7년([[기원전 181년|기원전 181]]) 고제의 종제면서종제이면서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우는 데 동조한 [[유택]]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낭야군]]을 분할했다. 여후 8년([[기원전 180년|기원전 180]])

이듬해 여후가 사망한 후, 여씨 여씨일족이일족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안에 들어가 있던 동생 [[유장 (성양경왕)|성양경왕]](당시 주허후)이 알게 되었다. 주허후와 동모후 [[유흥거]]는 형 제애왕에게 거병을 재촉해 자신들이 내응하고 형을 황제로 세우고자 하였다.
 
제애왕은 여씨 일족이 감시역으로 파견한 승상 소평(召平)을 공격해 자살로 내몰고 외척 사균(駟鈞)·[[광록훈|낭중령]] 축오(祝午)·[[집금오|중위]] 위발(魏勃)과 군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낭야왕 [[유택]]을 속여 유택의 군사를 빼앗고 여나라 땅인 제남군을 공격하고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을 규탄하는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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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조정에서는 상국 [[여산 (사람)|여산]]이 [[대장군]] [[관영 (전한)|관영]]을 파견해 토벌하려 했지만 관영은 여씨 일족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았다. 또한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여씨일족들이 득을 보는 것이라 생각해 형양(滎陽)에 주둔하고 제왕을 비롯한 제후왕들에게 여씨 일족이 타도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공문을 보냈기 때문에, 제애왕은 국경에서 기다렸다.
 
이윽고 여산·[[여록]] 등의 여씨 일족은 주허후와 [[주발]]·[[진평]] 등에게 죽었다. 대신들은 다음 황제를 누구로 하는가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제애왕의 어머니의 친정인 사(駟)씨 가문이 악인들이라는 이유로 제애왕은 선택되지 않고 대신 고조의 넷째 아들인 [[대 (전한)|대나라]][[왕 (작위)|]](代王) [[전한 문제|유항]]이 추대되었다(문제).<ref>문제는 기원전 202년생이며, 제애왕의 동생 성양경왕은 기원전 200년생이므로, 문제가 비록 제애왕의 작은아버지지만 나이는 오히려 제애왕이 더 많을 수도 있다.</ref> 제애왕은 군사를 이끌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문제는 제애왕이 여씨에게 빼앗긴 낭야군·제남군에 제도혜왕 때에 여씨가 빼앗은 [[성양군]]까지 제나라에 돌려주었다.
 
제애왕은 문제 원년([[기원전 179년|기원전 179]])에 사망했다.죽으니 [[시호]]를 [[애 (시호)|애]](哀)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유칙]]이 뒤를 이었다.
 
== 출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