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우치 가즈토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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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에는 히데쓰구의 숙로격이었던 제 다이묘와 함께 출병을 면했지만, 군선의 제조나 [[후시미 성]](伏見城)의 보청 등을 담당해 인부를 바쳤다. [[분로쿠]](文禄) 4년([[1595년]])에는 히데쓰구가 모반 혐의로 처형되어, 가쓰토요와 함께 히데쓰구를 섬기던 중신인 [[와타라세 시게아키]](渡瀬繁詮)가 히데쓰구를 변호하기 위해 할복하였다. 그러나 가쓰토요는 다른 숙로인 나카무라ᆞ호리오 등과 함께 무관계의 입장을 관찰해, 연좌를 면하였다. 이 때에 히데쓰구의 소령으로부터 8000석을 가증받았다.
 
히데요시의 사후인 [[게이초]](慶長) 5년([[1600년]])에는 [[고다이로]](五大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아이즈 (후쿠시마현)|아이즈]]의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上杉景勝)의 토벌에 참가해, 이에야스가 비운 사이에 [[고부교]](五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등이 거병하자 동군에 가담하였다. 이 사이에, 가쓰토요는 [[시모쓰케 국]](下野国) 오야마(小山)에서 있었던 군의에서 제장이 동군, 서군에의 거취를 방황하는 중에, 맨 먼저 자신의 거성인 [[가케가와 성]](掛川城)을 이에야스에게 제공하는 뜻을 발언해 환심을 샀다. 이 거성을 제공하는 안은 [[호리오 다다우지와다다우지]]와 사전에 협의했을 때에는 호리오가다다우지가 제안하기로 한 것을 가로챘다고 한다.([[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번한보(藩翰譜)" 단 [[도카이]](東海)도 출신의 다른 다이묘인 나카무라 가즈우지가 죽음의 문턱에 있었고, 동시에 다다우지의 아버지 호리오 요시하루도 자객에게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있던 등 노련한 세대가 행동력을 잃고 있는 가운데 주변의 세력이 동군에 붙는 것을 가즈토요가 적극적으로 정리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다. [[미카와 국]](三河国) [[요시다 성 (도요하시 시)|요시다 성]](吉田城)의 성주인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등도 이 시기, 가쓰토요와 가끔 접촉하고 있어, 이런한 협의를 하고 있었다고 고려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본전에서는 모리(毛利)·조소카베(長宗我部)군 등의 견제를 담당해, 이렇다할 공훈은 없었지만 전투 전의 공적을 높게 평가받아 도사 국 1국·9만 8000석(다이코 검지의 때에 조소카베 일족이 제출했던 석고, 후에 야마우치 일족 자신의 검지에서 20만 6000석여의 석고를 보고하였다.)을 받았다.
 
=== 도사 1국의 영주로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