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다르 1세 (세르비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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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화해 ==
세르비아 헌법 역사에서 최초로 알렉산다르 왕과 드라가 왕비의 이중 권력을 체제를 만들었으며 자유 헌법을 제정하고 정당을 조정했으며 드라가 왕비와 니코비지니코디예 중위가 후계자로 추측될 정도였다.
 
당시 경제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국민들은 더욱 가난해졌으며 기근으로 죽은 자도 많은데 정작 알렉산다르는 그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게다가 이로써 의회가 왕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자 [[1903년]] 3월 다시 세 번째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을 정지시켰고 이는 다시금 군대를 비롯한 전 국민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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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 ==
{{본문|5월 타도}}
알렉산다르 국왕은 드라가 왕비의 동생 [[니코비지니코디예 콘스탄티노비크]]루녜비차 중위를 후계자로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니코비지니코디예 중위는 전 국왕 밀란 1세의 이모의 손녀 [[앵카안카 오브레노비치 공주]] 공주와 결혼했다.
 
이에 왕비의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육군 대령 [[드라구틴 드미트리예비치]]가 비밀 육군 장교 그룹인 [[흑수단]]을 조직하고 알렉산다르 국왕 대신 [[페타르 1세 (세르비아)|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를 새 국왕으로 모시기로 결정했고 후에는 반오스트리아 정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다.
 
[[1903년]] [[6월 11일]] 이른 아침 흑수단은 베오그라드 왕궁으로 쳐들어가 시종들을 살해했고 국왕 부부와 총리 [[니콜라 파식파시치]] 침실의 비밀 벽장으로 숨었다. 한참 후 이젠 안전하다고 생각한 드라가 왕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를 들은 흑수단이 다시 쳐들어와 수색을 펼쳐 국왕 부부를 찾아냈다.
 
국왕 알렉산다르와 드라가 왕비는 총에 맞아 암살되고 시체는 절단되고 배가 갈려 2층 창문에서 정원 비료 더미 위에 던져졌다고 하며 현재 베오그라드의 세인트 마크 교회의 토굴에 묻혀 있다. 이후 흑수단의 추대로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가 페타르 1세로 즉위하면서 오랫 동안 원수 지간이던 오브레노비치 가문과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이 알렉산다르 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은 정권을 쥐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