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톤 (그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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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토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배우자 = [[올덴부르크의 아말리아]]
|부친 = [[바이에른의루트비히 1세 (바이에른)|루트비히 1세]]
|모친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테레제]]
|출생일 = [[1815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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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파일:OtonIdeGrecia1865.jpg|섬네일|왼쪽|150px|오톤 (1865년)]]
오톤은 그리스를 좋아했던 [[바이에른의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1세 (바이에른)|루트비히 1세]] 국왕의 차남으로, 열강에 의해 그리스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오톤의 정부는 바이에른 궁정의 관직자로 구성된 세 사람의 섭정 회의에서 운영하였다. 성년이 된 오톤은 섭정들이 대중의 지지를 잃자 이들을 제거하고 절대 군주가 되었다. 결국 그리스의 신민들이 강력하게 헌법을 요구하고, 무장 봉기까지 일어나자 오톤은 1843년 헌법을 승인하였다.
 
치세 전반에 걸쳐 오톤은 그리스의 빈약한 재정과 교회 업무에 관한 정부에 역할의 문제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시기 그리스의 정치는 세 열강의 동맹에 기초를 두고 있었으며, 오톤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각 열강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오톤은 각 열강의 이익을 살펴주어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