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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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페르시아군과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원전 334년]] [[4월 8일]]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지방 수도와 [[사르디스]]의 재무금고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는 아오니아 해안선을 따라 계속 진격했고, 도시들마다 자치권과 민주주의를 승인하였다. [[아르케메네스]] 군이 지키는 [[밀레토스]]는 정교한 페르시아 해군을 상대로 정교한 공성전을 필요로 했다. 더 남쪽인 [[카리아]]의 [[할리카르낫소스]]에선 알렉산더가 성공적으로 그의 첫 대규모 공성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결과적으로 그의 적 로데스의 용병수장 [[멤논]]과 페르시아 카리아의 총독 오론토바트스를 바다로 철수시켰다. 알렉산더는 카리아 정부를 떠나 차후에 알렉산더에게 카리아 지방의 여왕으로 선택되는 아카톰니드 왕조의 일원인 아다에게로 향했다. [[할리카르낫소스]]로부터 알렉산더는 [[리카아 산]]까지 진격했고, 페르시아 해군 기지를 저지하기 위해 팜필리아 평야에서 해안 도시들을 공격했다. 팜필리아로부터 해안가까지 주요한 항구가 없기에 알렉산더는 섬으로 향했다. 테르메소스에서 알렉산더는 피디시안을 모욕했으나, 난장판으로 만들진 않았다. 고대의 고르디움의 수도에서 알렉산더는 아무도 풀지 못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었고, 알렉산더는 매듭을 어찌 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칼로 매듭을 베었다.
 
알렉산더는 [[시리아]]와 [[레벤트]]의 해안가를 정복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기원전 332년]] 그는 [[튀루스]]를 공격했고 긴 공성전 끝에 점령한 후, 테바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인군인과 남성은 모조리 학살하고 여자들과여자와 어린이들은어린이는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알렉산더가 튀루스를 파괴했을 때 [[이집트]]로 가는 길목의 대부분의 마을은 빠르게 항복했다. 그는 [[예루살렘]]에 해를 입히지 않고 남쪽 이집트로 향했다. 그러나 [[가자]]의 저항을 직면한 알렉산더는 강하게 무장된 언덕에 위치한 공성전을 요하는 기지를 마주했다. 알렉산더의 공학자는 높은 위치를 근거로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으나 이것은 알렉산더의 의욕을 높일 뿐이었다. 3번의 성공적인 공성전 이후에 기지는 함락되었다. 알렉산더는 이때 심각한 어깨부상을 당했다.
 
[[기원전 332년]] 후반기에도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이집트로 진격했고, 그는 해방자로 여겨졌다. 그는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의 예언에 나와 있는 [[아몬]]의 아들이라고 칭송받았고, 그러므로 알렉산더는 자주 [[제우스]] 아몬이 그의 진정한 아버지로 여겨졌으며 그가 죽은 이후 그의 신성함의 상징으로 양의 뿔이 동전에 묘사되어 있다. 그가 이집트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이집트에 지었고 그의 죽음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번영하는 수도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