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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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렉산더의 성격은 매우 급하고 충동적이며 사납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업적에 영향을 미쳤다. 알렉산더는 고집이 매우 세서 심지어 아버지의 명령조차도 논리가 결여된 강압적인 것이면, 따르지 않고 반항할 정도였지만, 논리를 앞세워 명령하면 잘 순종할 정도로 매우 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차분한 관점에서 볼 수 있고 논리적이며 계산적이다. 그는 지식에 대한 커다란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철학]]과 책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페르시아 원정 초기,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지역.)로 건너갔을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당시 철학자들 사이에서 불문율로 여겨지던 가장 핵심적이고 은밀한 내용들은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가장 핵심적이고 은밀한 내용들을 책으로 출판하자 이를 나무라는 편지에서 자신은 남을 힘으로 누르기보다 최고의 지식을 가짐으로서 누르고 싶다고 말했고, 전쟁터에서도 늘 철학자들과 학자들과 예술가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심지어 인도 원정에서 자신에 대한 저항을 부추겼던 귐노소피스타이 학파(인도의 나체주의 철학 학파.)철학자 10명을 사로잡은 후 그들에게 철학에 대한 질문들을 해 어느 정도 만족한 답변들을 듣자 애초의 생각을 바꿔 이들에게 모두 선물을 주어 살려서 돌려 보낼 정도였다. 이런 모습들은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일 것이다. 알렉산더는 지적이었고, 빨리 지식을 흡수했다. 그의 지적이고, 이성적인 면은 장군과 정치가로서의 성공과 그의 능력이 충분히 증명한다. 그는 성욕과 사치, 심지어 식욕까지 잘 절제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음주는 절제하지 못했다. 알렉산더는 예술과 과학 모두에 학식이 있고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운동과 올림픽에 아버지와는 다르게 별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커다란 이상의 명예와 영광을 추구할 뿐이었다. 그는 대단한 카리스마와 힘 있는 성격을 가졌고 그것들이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의 독특한 특징은 다른 어떤 장군도 마케도니아와 나머지 제국을 그가 죽은 다음 통합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오로지 알렉산더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말년에 특히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이후 알렉산더는 [[과대망상]]과 [[편집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스스로의 형언할 수 없는 운명과 친구들의 아첨과 엮인 그의 위대한 업적은 아마도 이런 증상을 나타내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의 엄청난 망상은 그의 유언장과 세상을온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에서 손쉽게 찾을 수 있다. 다양한 작품에서 그의 끝없는 욕망을 묘사하는 한 그의 욕망과 관련된 별칭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고정적으로 후세에 전달될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신이라는 점을 믿었던 것 같으며, 적어도 신이 되려고 했던 것 같다. [[올림피아스]]는 항상 그가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고, 시와에 아문에서 그에게 [[신탁]]을 내린 것으로 그 설명은 확인된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제우스-아문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궁정에서 페르시아 관습을 사용했지만, 마케도니아 인들은 거부했고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이런 행동은 궁정 내의 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잃게 만들었으나, 알렉산더는 실용적이었기에 대부분의 왕국에서 왕이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문화적으로 거리가 있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과대망상보다 그의 행동은 그의 권력을 지키고 왕국을 계속 뭉쳐 놓으려는 실용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세 번 결혼했다. [[박트리아]] 귀족 옥시라테스의 딸인 [[록사네]]와는 사랑에 빠진 것이며, 다리우스의 딸인 페르시아 공주 [[스타테이라 2세]]와 아르타적시스 3세의 딸인 [[파리사티스 2세]]와는 정치적인 이유였다. 그는 정식으로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4세]]는 [[록사네]]의 아들이며, 다른 하나는 마케도니아의 [[헤라클레스]]로 그가 세 명의 부인을 맞이하기 이전에 사귄 여성이고, 후일 그의 후궁이 되는 프리기아 귀족 [[바르시네]]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다른 아들은 록사네가 바빌론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
 
알렉산더는 또한 그의 친구, 장군들과 호위인 [[헤파이스티온]]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다들 마케도니아 귀족의 아들들이었다. 헤파이스티온의 죽음은 알렉산더를 망쳐놨다. 그 사건은 알렉산더의 건강을 망쳤고, 그의 사망 직전에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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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의 성생활은 추측과 논쟁으로 주관적이다. 고대의 어떤 기록도 알렉산더가 [[동성애자]]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알렉산더와 헤파이스티온의 관계가 성적이라는 증거도 없다. 아엘리안은 그러나 저작 알렉산더의 두 번의 [[트로이]] 방문에서 알렉산더가 [[아킬레스]]와 헤파이스티온의 무덤에 화관을 씌웠고, 그가 알렉산더의 연인이었고 또한 파트로클루스는 아킬레스의 연인이었다는 수수께끼 같은 글이 있었다. [[그리스어]]로 사랑을 뜻하는 에로메노스가 꼭 성적인 의미만은 아니어서, 알렉산더는 [[양성애자]]였을 수도 있고, 당시엔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그린은 고대 문헌에 알렉산더가 여자에게 많은 성욕을 느꼈다는 약간의 문헌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말년까지 후계자를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젊었고 오그던은 알렉산더 부부의 기록은 같은 나이의 필리포스 2세의 기록보다 훨씬 인상적이라고 언급한다. 아내와 떨어져서 그는 더욱 많은 여성 동료가 있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왕의 방식으로 많은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사용을 철저하게 절제하였다. 심지어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한 [[록사네]]까지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까지는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전했다. 육욕 절제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린은 기간의 기록을 인용해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슬픔에 죽은 다리우스의 어머니인 [[시시감비스]]와 그를 입양하고, 또 후에 자신이 카리아 지방의 여왕으로 앉힌 아다 같은 여성과 꽤나 깊은 우정관계를우정 관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이 둘을 어머니로 부르며 극진히 예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