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다후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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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토 단다이 취임과 간노의 소란 ===
다다요시는 다카우지나 중신들의 행동을 보고 다다후유를 되도록 교토에서 내보내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고, 『태평기』에 따르면 다다요시의 양자인 다다후유의 개선에 대해 아시카가 집안으로부터 싸늘한 시선이 존재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쇼헤이 4년/조와 5년([[1349년]]) 4월 7일에 다다후유는 히고 죠도지(備後浄土寺)의 장로에 대해 사이고쿠(西国)로 내려갈 뜻을 전하고 그에게 기도를 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으므로 그 이전에 다다요시의 제안으로 다다후유는 나가토 단다이(長門探題)로 임명되었고, 4월 11일에<ref>『대일본사료』(大日本史料)제6책 12편 601-602항. 「園太暦」「師守記」「建武三年以来記」.</ref> 교토를 떠났다고 한다. 다다후유의 나가토 파견의 이유는파견은 고노 모로나오에 대한 다다요시의 대항책이라는 설과 후에훗날 간토 지방에 설치되는 [[가마쿠라 부]](鎌倉府)의 ‘사이고쿠 버전’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설이 있다.있는데, 나가토 단다이는 과거 가마쿠라 막부가 [[빈고 국|빈고]](備後)・[[빗추 국|빗추]](備中)・[[아키 국|아키]](安芸)・[[스오 국|스오]](周防)・[[나가토 국|나가토]]・[[이즈모 국|이즈모]](出雲)・[[이나바 국|이나바]](因幡) 등 사이고쿠를 맡아 [[몽골]]의 습래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된설치한 직책이었는데,것이었고 가마쿠라 막부에서 이를 상설직으로 삼았던 것과는막부와는 달리 무로마치 막부에서는막부는 나가토 단다이를 상설직으로 삼지 않았다.않았기에, 처음부터 다카우지가 다다후유를 멀리하기 위해서위해 특별히 설치한 직책이었다는 것이다지적도 있다.<ref>瀬野精一郎 저 『人物叢書‐足利直冬』吉川弘文館、2005年、p.13</ref> 그러나 새로 설치된 직책인 데다 또 명목상으로는 일단 다카우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니시나 모리무네(仁科盛宗) 등 많은 [[효조슈]](評定衆)、부교(奉行)가 다다후유를 수행하였다.
 
이 무렵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쇼군 다카우지와 함께 이원정치를 행하던 다다요시와 각지에서 군사적 공적을 세웠던 집사(執事) 고노 모로나오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고 급기야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이라고 불리는 내분으로까지 발전한다. 8월에 모로나오의 쿠데타로 다다요시가 실각하자 다다후유는 상경하고자 했으나 [[하리마 국|하리마]](播磨)에서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 엔신円心)에게 저지당했다. 다다후유는 [[빈고 국]](備後国)의 도모노쓰(鞆津)에 머무르며머무르면서 주변의 무사들에게 은상을 베풀며 인심을 장악하고 세력을 굳히는 것을 도모하였다. 빈고가 나가토 단다이의 관할이기는 했지만 중추부인 나가토도 아닌 땅에 머무르는 것은 명백한 명령 위반이었고, 다다후유는 나가토뿐 아니라 주고쿠 지방에까지 군세를 재촉하는 등의 태도를 취했기취하며 세력을 뻗쳤기 때문에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토벌령을 내리게 된다. 9월 13일에 다다후유는 도모노쓰에서 모로나오의 명령을 받은 스기하라 마타사부로(杉原又三郎) 등의 200여 기(騎)에게 습격당했고, 이소베 사콘노소죠(磯部左近将監)나 가와시리 유키토시(河尻幸俊) 등의 도움으로 바다를 건너 규슈로 달아났다.
 
그 달에 [[히고 국]](肥後国) 가와시리 진(河尻津, 지금의 일본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시)로 해서 규슈로 상륙、상륙한 다다후유는 아시카가 쇼군가의 권위를 이용해 [[고쿠진]](国人) 세력이나 아소 씨(阿蘇氏)에게 그들이 지배하던 영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등으로 규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혔다. 다다후유가막부는 규슈로 갔음을 알게 된 막부는 다다후유에게 출가해서 교토로 올 것을 명령하였으나명하였으나 다다후유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다시금 다다후유에 대한 막부의 토벌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규슈에는 남조로부터 정서장군(征西将軍)으로 임명된 황자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을 끼고 있는 남조측 기쿠치 씨(菊池氏)나 아시카가 씨의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하카타(博多)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잇시키 노리우지(一色範氏, 도켄道猷)、[[다자이후]](大宰府)의 [[쇼니 요리히사]](少弐頼尚) 등의 세력이 정립하고 있었는데, 다다후유는 다카우지로부터 다다후유의 토벌 명령을 받은 잇시키 씨 등과 싸우면서 가네요시 친왕의 정서부와 협력노선을 취해 다자이후 공략을 노렸다. 쇼니 요리히사는 처음에는 잇시키 씨와 협력해 다다후유와 싸웠으나, 다다후유의 세력이 광대해지자 잇시키 씨에 대한 대항심으로 쇼헤이 5년/[[간노]](観応) 원년([[1350년]]) 9월에 다다후유편으로 돌아선다(일설에 따르면 그를 사위로 맞았다고도 한다). 쇼니 씨의 가세로 세력을 더욱 확대한 다다후유 등은 잇시키 씨를 하카타에서 구축했다. 또한 다다후유는 간노로 개원된 뒤에도 약 1년 4개월 동안 예전의 연호인 조와를 그대로 사용한다.
 
애초에 아시카가 다다후유로써는 자신의 세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규슈에서 재지 무사 세력을 독자적으로 확보할 필요성이 절실했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다다후유는 남조를 지지하면서도 자신의 양아버지 다다요시는 물론 자신과의 사이가 소원했던 친아버지 다카우지의 위세까지 빌려야 했다.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로 도망친 시점에서 다급히 군사력을 모으고자 재지 무사들에게 발급한 문서에서는 다다후유 자신이 규슈로 내려온 것이 어디까지나 교토<ref>"自京都依有被仰之旨, 所令下向也. 早早馳參" 《시키 문서》(志岐文書) 조와 5년(1349년) 9월 16일자(《남북조유문》권3, 규슈편2623).</ref> 또는 양전(兩殿,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다다요시)<ref>"爲奉息兩殿御意, 所打入也. 急速厚東周防權守(武藤)令同心合力, 可致忠節之狀如件" 《스오 깃카와 가 문서》(周防吉川家文書)(《남북조유문3》, 규슈편2657</ref>의 뜻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규슈에서 남조를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북조에도 한쪽 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태였던 아시카가 다다후유의 등장과 간노의 소란이라는 무로마치 막부의 파벌 싸움이 규슈 현지에서 기존의 남조를 지지하던 정서부 지지파와 북조를 지지하는 잇시키 등의 규슈 단다이 지지파에 아시카가 다다후유 지지파까지 삼파전 양상을 띠게 되면서 기존의 남조와 북조를 지지하던 규슈 내의 두 파벌 모두에 내부 혼란을 일으켰고, 급기야는 일부 무사와 백성들이 군량미 보충 등의 목적으로 현지를 이탈해 외부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결과가 14세기 한반도의 고려나 원-명 교체기 중국 남해안에 출몰하던 [[왜구]]로 나타났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어 있다.<ref>김보한 '가마쿠라기 왜구와 무로마치기 왜구의 성격과 그 주체 연구' 한일관계사연구52집, 2014년, 72~74쪽;이영 《왜구와 고려 일본관계사》 도서출판 혜안, 2011년</ref>
당초에 쇼니 요리히사는 잇시키 씨와 협력해 다다후유와 싸웠으나, 다다후유의 세력이 광대해지자 잇시키 씨에 대한 대항심으로 쇼헤이 5년/간노(観応) 원년([[1350년]]) 9월에 다다후유를 자신의 진영으로 맞아들였다(일설에 따르면 그를 사위로 맞았다고도 한다). 세력을 확대한 다다후유 등은 잇시키 씨를 하카타에서 구축했다. 또한 다다후유는 간노로 개원된 뒤에도 약 1년 4개월여에 걸치고 조와 연호를 사용한다.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일당의 세력이 규슈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다다후유에 대한 토벌 명령을 내렸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태력(園太暦)』 조와 5년([[1349년]]) 12월 6일 기사에는 교토에서 다다후유가 규슈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신의 양아버지를 내쫓은 원흉 고노 모로나오 등을 벌하고자 상경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다카우지는 다다후유와 쇼니 씨와의 동조를 받아、막부에서는 다카우지 자신이 규슈로 출병하기로 했다. 다카우지는 주고쿠 지방의 유력 고쿠진들에게 동원 명령을 내리고, 이를 알게 된 다다후유도 다카우지의 규슈 진공을 저지하고자 맞불을 놓듯 주고쿠 지방에 동원명령을 내린다. 이때 다다후유는 시코쿠(四国)에도 동원령을 내렸고 현지 영주들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 인정이나 은상(恩賞) 급여 등도 자신의 이름으로 행했다. 6월 21일、다카우지는 선봉으로써 고노 모로야스(高師泰)를 보냈으나, 다다후유측의 모모이 요시사토(桃井義郷)가 이와미(石見)로 내려와 다카우지군의 진군을 방해하였다. 모로야스가 이끌던 다카우지측 군세는 이와미의 산가쿠 성(三角城) 전투에서 패하고 이즈모로 달아났다.<ref>『원태력』 간노 원년(1350년) 11월 10일조</ref> 게다가 그 와중에 다다요시 또한 교토를 탈출해 [[야마토 국|야마토]](大和)로 가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모아、남조에 귀순해 형 다카우지에 맞섰다. 이때 다카우지는 효고(兵庫)에서 [[비젠 국|비젠]](備前)의 미와(三石)、[[후쿠오카]](福岡)로 와서 머무르고 있었고, 다다요시가 남조에 귀순해 자신에 맞서는 군사를 일으키고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규슈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후쿠오카에서 곧바로 교토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그 사이에 교토 유수를 맡고 있던 요시아키라가 다다요시에게 쫓겨났다. 다카우지는 모로나오나 요시아키라와 함께 교토 탈환을 노렸으나, 다다요시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단바 국|단바]](丹波) ・ 하리마로 물러나야만 했다. 쇼헤이 6년/간노 2년([[1351년]]) 2월、다카우지는 다다요시와 화의를 맺었으나, 고노 모로나오・모로야스 형제는 다다요시측에게 살해당한다. 이로써 다다요시는 정계에 복귀했고 다다후유는 다다요시의 요구에 응해서 다카우지로부터 3월에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으로 해서 일시적으로나마 다다후유의 입장이 완전히 앞서게 되었다.<ref>『원태력』 간노 2년([[1351년]]) 3월 3일조</ref> 이 일로 6월 10일부터 다다후유는 조와 대신 북조의 연호인 간노 연호를 사용한다.
 
당초에 쇼니 요리히사는 잇시키 씨와 협력해 다다후유와 싸웠으나, 다다후유의 세력이 광대해지자 잇시키 씨에 대한 대항심으로 쇼헤이 5년/간노(観応) 원년([[1350년]]) 9월에 다다후유를 자신의 진영으로 맞아들였다(일설에 따르면 그를 사위로 맞았다고도 한다). 세력을 확대한 다다후유 등은 잇시키 씨를 하카타에서 구축했다. 또한 다다후유는 간노로 개원된 뒤에도 약 1년 4개월여에 걸치고 조와 연호를 사용한다. 다카우지는 다다후유 일당의 세력이 규슈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다다후유에 대한 토벌 명령을 내렸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원태력(園太暦)』 조와 5년([[1349년]]) 12월 6일 기사에는 교토에서 다다후유가 규슈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신의 양아버지를 내쫓은 원흉 고노 모로나오 등을 벌하고자 상경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다카우지는 다다후유와 쇼니 씨와의 동조를 받아、막부에서는 다카우지 자신이 규슈로 출병하기로 했다. 다카우지는 주고쿠 지방의 유력 고쿠진들에게 동원 명령을 내리고, 이를 알게 된 다다후유도 다카우지의 규슈 진공을 저지하고자 맞불을 놓듯 주고쿠 지방에 동원명령을 내린다. 이때 다다후유는 [[시코쿠]](四国)에도 동원령을 내렸고 현지 영주들의 영지에 대한 소유권 인정이나 은상(恩賞) 급여 등도 자신의 이름으로 행했다. 6월 21일、다카우지는 선봉으로써 고노 모로나오의 동생인 고노 모로야스(高師泰)를 보냈으나, 다다후유측의 모모이 요시사토(桃井義郷)가 이와미(石見)로 내려와 다카우지군의 진군을 방해하였다. 모로야스가 이끌던 다카우지측 군세는 이와미의 산가쿠 성(三角城) 전투에서 패하고 이즈모로 달아났다.<ref>『원태력』 간노 원년(1350년) 11월 10일조</ref> 게다가 그 와중에 다다요시 또한 교토를 탈출해 [[야마토 국|야마토]](大和)로 가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모아、남조에 귀순해 형 다카우지에 맞섰다. 이때 다카우지는 효고(兵庫)에서 [[비젠 국|비젠]](備前)의 미와(三石)、[[후쿠오카]](福岡)로 와서 머무르고 있었고, 다다요시가 남조에 귀순해 자신에 맞서는 군사를 일으키고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규슈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후쿠오카에서 곧바로 교토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그 사이에 교토 유수를 맡고 있던 요시아키라가 다다요시에게 쫓겨났다. 다카우지는 모로나오나 요시아키라와 함께 교토 탈환을 노렸으나, 다다요시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단바 국|단바]](丹波) ・ 하리마로 물러나야만 했다. 쇼헤이 6년/간노 2년([[1351년]]) 2월、다카우지는 다다요시와 화의를 맺었으나, 고노 모로나오・모로야스 형제는 다다요시측에게 살해당한다. 이로써 다다요시는 정계에 복귀했고 다다후유는 다다요시의 요구에 응해서 다카우지로부터 3월에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으로 해서 일시적으로나마 다다후유의 입장이 완전히 앞서게 되었다.<ref>『원태력』 간노 2년([[1351년]]) 3월 3일조</ref> 이 일로 6월 10일부터 다다후유는 조와 대신 북조의 연호인 간노 연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사이에 다시 불화가 생겨나고 같은 해에 다카우지가 남조와 일시 강화를 맺었으나(쇼헤이 일통正平一統) 다카우지는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後村上天皇)으로부터 다다요시 토벌령을 받는다. 다다후유에 대해서도 다시금 토벌령이 내려졌고 잇시키 씨가 정서부와 협력해 세력을 회복했다. 쇼헤이 7년/[[분나]](文和) 원년([[1352년]])、가마쿠라에서 다다요시는 다카우지에게 항복했고, 도쇼지에 유폐되어 2월 26일에 급서한다(다카우지에 의한 암살설도 존재하고 있다). 쇼헤이 일통은 파탄났고, 규슈에 있던 다다후유는 고립되었다.
 
이때 다카우지는 효고(兵庫)에서 [[비젠 국|비젠]](備前)의 미와(三石)、[[후쿠오카]](福岡)로 와서 머무르고 있었고, 다다요시가 남조에 귀순해 자신에 맞서는 군사를 일으키고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에 규슈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후쿠오카에서 곧바로 교토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그 사이에 교토 유수를 맡고 있던 요시아키라가 다다요시에게 쫓겨났다. 다카우지는 모로나오나 요시아키라와 함께 교토 탈환을 노렸으나, 다다요시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단바 국|단바]](丹波) ・ 하리마로 물러나야만 했다. 쇼헤이 6년/간노 2년([[1351년]]) 2월、다카우지는 다다요시와 화의를 맺었으나, 고노 모로나오・모로야스 형제는 다다요시측에게 살해당한다. 이로써 다다요시는 정계에 복귀했고 다다후유는 다다요시의 요구에 응해서 다카우지로부터 3월에 [[규슈 단다이]](九州探題)로 임명되었다. 이 임명으로 해서 일시적으로나마 다다후유의 입장이 완전히 앞서게 되었다.<ref>『원태력』 간노 2년([[1351년]]) 3월 3일조</ref> 이 일로 6월 10일부터 다다후유는 조와 대신 간노 연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사이에 다시 불화가 생겨나고 같은 해에 다카우지가 남조와 일시 강화를 맺었으나(쇼헤이 일통正平一統) 다카우지는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後村上天皇)으로부터 다다요시 토벌령을 받는다. 다다후유에 대해서도 다시금 토벌령이 내려졌고 잇시키 씨가 정서부와 협력해 세력을 회복했다. 쇼헤이 7년/[[분나]](文和) 원년([[1352년]])、가마쿠라에서 다다요시는 다카우지에게 항복했고, 도쇼지에 유폐되어 2월 26일에 급서한다(다카우지에 의한 암살설도 존재하고 있다). 쇼헤이 일통은 파탄났고, 규슈에 있던 다다후유는 고립되었다.
 
=== 다카우지와의 대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