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 대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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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할 때부터 거란과는 거리를 두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거란이 멸망시켰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고려의 북진 정책|고려는 북진 정책]]을 국시로 내걸었기 때문에 국경을 마주한 거란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거란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려의 정책과 더불어 [[송나라]]와 고려가 연합할 경우, 고려가 자신들의 뒤를 칠 것을 우려하여 사전에 고려를 완전히 자신들의 속국 정도로 제압하든지 최소한 송나라와 거리를 두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거란은 고려를 3차례 침공하였다.
 
[[993년]]([[고려 성종|성종]] 12) 1차 침입에서는 [[소손녕]]이 이끈 거란군에게 승리한 뒤 [[서희]]가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하였고, [[1010년]]([[고려 현종|현종]] 1) 2차 침입에서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공해 왔으나 별 소득없이 돌아갔고, [[1018년]]~[[1019년]] 3차 침입에서 [[강감찬]]이 구주귀주 대첩을 이루었다.
 
== 경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