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5세 폰 데어 팔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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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보헤미아 반란, 빈 공격, 빌라호라 전투 등 추가
투런->진드리히 마타야스 트런 백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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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교육을 받으며 [[1610년]] 부왕 [[프리드리히 4세]]가 사망하자 승계했다.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보헤미아]]에서 귀족들이 [[로마 가톨릭]]교도인 [[오스트리아]]의 대공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항해 [[보헤미아 반란]]을 일으켰고 [[1619년]] 11월 4일 [[체코]] [[프라하]]에서 즉위식을 가져 프리드리히 5세는 왕위에 올랐다.
보헤미아 국왕으로 등극한 직후 프리드리히 5세는 투른[[진드리히 백작과마타야스 트런 백작]]과 더불어 보헤미아-팔츠-지벤뷔르겐의 개신교 연합군을 이끌고 빈을 공격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선제공격으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은 페르디난트 2세에 대한 지원을 결의하였고, 그러한 결의로 가톨릭 연합군은 개신교 연합군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보헤미아-팔츠의 총사령관이었던 안할트(C. v. Anhalt)로 하여금 최후 결전을 준비하게 했다. [[1620년]] [[11월 8일]] 안할트는 21,000 명으로 구성된 보헤미아-팔츠 연합군을 이끌고 프라하 서부 근교의 얕으막한 구릉인 하얀 산이라는 뜻의 빌라호라 [[백산 전투]]에서 [[카렐 보나벤투라 부쿼이]]와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가 이끄는 28,000 명의 부대에 대패했다. [[1621년]]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와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이 군사를 일으켜 서부 [[독일]] 지역에서 싸웠으나 역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에게 패하고 [[1623년]]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바이에른 선제후)|막시밀리안 1세]]에게 넘어갔다. [[1628년]]에는 [[바이에른]]이 [[오버팔츠]]를 합병하고 프리드리히는 복위하지 못했다. [[1622년]] [[네덜란드]] [[헤이그]]로 망명한 프리드리히는 여생을 [[네덜란드]]와 [[영국]]이 제공한 돈으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