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부아지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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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년 (1743~1775) ==
=== 유년 및 청년기 ===
라부아지에는 물을 100일 동안 증류하였고 그 결과 고체가 남음을 알게 되었지만, 생성된 고체의 질량을 측정한 후 물을 증류하는 데 사용했던 용기의 질량을 측정하자 생성된 고체의 질량만큼 용기의 질량이 감소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생성된 고체는 물에서 연유한 물질이 아니라 용기가 일부 녹아서 생성된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그리고 이는 물이 흙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였다.<ref>''Ibid.'', p.32~33.</ref>
라부아지에는 [[1743년]] [[파리 (도시)|파리]]의 의회 법률 고문으로 일하던 장 앙투안 라부아지에와 그의 아내인 에밀리에 라부아지에 사이의 첫째 아들로 [[파리 시|파리]]에서 태어났다. 에밀리에 라부아지에는 딸을 한 명 더 낳은 뒤 [[1794년]] [[3월 24일]] [[사망]]하였다. [[1748년]] 라부아지에의 가족은 장 앙투안의 장모와 함께 살게 되었다.<ref>Poirier, J. P., ''Lavoisier, chemist, biologist, economist'', trans. by Balinski, R.,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6, p.4~5.</ref> 그의 아버지의 바람으로, [[1754년]]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llang|fr|Collége Mazarin}})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760년]] 여동생이 사망한 후, 가족의 애정과 기대가 온통 그에게 집중되었다. 라부아지에 역시 그들에 기대에 부응하여 배우는 데에 상당한 열정을 가졌다. 라부아지에는 콜레주 마자랭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에게 배웠는데, 라카유는 라부아지에가 [[자연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데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ref>''Ibid.'', p.6.</ref>
 
라부아지에는 [[1761년]] 6월 콜레주 마자랭을 졸업하였고, 가문의 전통을 따라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자연 과학에 큰 관심을 두었고, 라카유의 조언을 따라 [[기상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라부아지에와 라카유와의 관계는 [[1762년]] 3월 라카유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ref>''Ibid.'', p.7.</ref> 라부아지에는 [[파리 식물원|왕의 정원]]<ref>오늘날의 [[파리 식물원]]({{llang|fr|Jardin des Plantes}})</ref>에서 [[베르나르 데 쥐시외]] 등의 수업을 듣기도 하였다. 특히 [[기욤프랑수아 루엘]]의 [[화학]] 수업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루엘은 [[지질학]]을 처음으로 가르친 화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실험적인 방법을 매우 중시하는 등 앞서 나가는 면도 있었으나, [[연금술]]과 [[사원소설]](四元素說)에 큰 관심을 가지는 등의 구시대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아버지의 친구인 [[장에티엔 게타르]]를 만나 [[1763년]] [[광물학]]적·[[지질학]]적 조사를 위해 [[발루아]] 지방으로 떠나기도 하였다.<ref>''Ibid.'', pp.8~10.</ref> 게타르는 이후로도 계속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지도하였다. 라부아지에는 [[1764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자연 과학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ref name="2007britannica"/>
 
=== 과학적 활동 ===
==== 초기 연구 ====
[[1764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대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방안에 관해서 공모를 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여기에 참여하였고 그의 제안은 뛰어남을 인정받아 [[1766년]] [[8월 9일]] 아카데미로부터 메달을 받았다.<ref>''Ibid.'', p.12.</ref> [[1765년]] [[2월 27일]] 라부아지에는 [[석고]]를 분석하여 그 논문을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다. 게타르의 제안으로 작성된 이 논문은 [[지질학]]·[[광물학]]·[[화학]] 등을 모두 다루고 있었다. [[1766년]] [[3월 19일]] 그는 석고에 관한 두 번째 논문을 제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필요성을 느껴 4월 아카데미의 실험 물리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 아카데미는 라부아지에의 신청을 거절하였으며, 라부아지에는 요청이 거절된 바로 다음 날 화학 분야에 회원 가입을 요청하였다.<ref>''Ibid.'', pp.13~16.</ref> [[1767년]] [[6월 14일]] 라부아지에는 게타르를 따라 [[보주 산맥]]을 탐사하러 떠났고, [[10월 19일]]에 [[파리 시|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라부아지에는 각 지역의 [[광천수]]를 분석하여 그것이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ref>''Ibid.'', p.20.</ref> [[1768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 자리에 공석이 생기자 라부아지에는 새로운 회원 후보자가 되었고, [[5월 18일]]의 투표에서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함에 따라 [[6월 1일]]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다.<ref>''Ibid.'', p.28.</ref>
 
==== 물에서 흙으로의 변화 ====
당시에 [[물]]을 계속해 증류하면 흙이 된다는 가설이 여러 과학자 사이에서 만연하였다. 과학자들은 [[식물]]이 물만으로도 자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물이 흙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로버트 보일]]을 포함한 많은 과학자가 물을 계속해서 증류하면 [[고체]]가 남으며, 이것이 물이 변화하여 생긴 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이러한 주장에 의심하였으며, [[1770년]] [[4월 10일]]에 발표한 논문에서 [[물]]이 흙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이 반증으로 인해서 라부아지에의 이름은 상당히 유명해졌다.<ref>''Ibid.'', pp.33~34.</ref>
 
라부아지에는 물을 100일 동안 증류하였고 그 결과 고체가 남음을 알게 되었지만, 생성된 고체의 질량을 측정한 후 물을 증류하는 데 사용했던 용기의 질량을 측정하자 생성된 고체의 질량만큼 용기의 질량이 감소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라부아지에는 생성된 고체는 물에서 연유한 물질이 아니라 용기가 일부 녹아서 생성된 물질이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그는 이 실험에서 물질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고 단지 형태가 바뀔 뿐이라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철저히 따랐다. 그리고 이는 물이 흙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였다.<ref>''Ibid.'', p.32~33.</ref>
 
==== 연소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