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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수를 비난한 김사국은 곧 사망했지만 장덕수에 대한 공금 착복 의혹과 비난은 계속되었다.
 
그가 죽은지 37년 뒤에야 결백이 증명되었다. 이 사건에 관해 뒷날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김철수]](金綴洙)는 장덕수의 결백을 증언했다. [[김철수]]가 [[1980년]] [[5월 16일]]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그 돈은 장덕수가 아니라 최팔용에게 전달됐다.<ref name="choi055"/> 그러나 어쨌든 이 사건으로 장덕수는 그 명성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고,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리하여 [[1923년]] [[4월]]에 도미 유학길에 오른다.<ref name="choi055"/>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도쿄]]를 경유한 장덕수는 [[치요다 구]] [[간다 (지요다 구)|간다]]에서 [[박열]] 등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했다([[장덕수 구타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사회주의]]자 및 사회주의 단체와 선을 긋게 된다. 그러나 후일 [[대한혁명단]]에서는 그의 이러한 경력을 들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