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천 (1888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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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노령견문기(5)의 김경천 1922-01-23.jpg|thumb|left|200px| 동아일보 1922년 1월 23 일자에 실린 공민(公民) [[나경석|나경석(羅景錫, 1890∼1959)]]의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5회 중의 경천(擎天) 김장군(金將軍)<ref name="gongmin"/>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EB%85%B8%EB%A0%B9%EA%B2%AC%EB%AC%B8%EA%B8%B0(6)%EC%9D%98_%EA%B9%80%EA%B2%BD%EC%B2%9C_1922-01-24.jpg?uselang=ko 노령견문기 6회분])]]
[[파일:김경천 회견기 1923-07-29.jpg|thumb|right|200px| 동아일보 1923-07-29 일자에 실린 김경천 장군 회견기 : 빙설(氷雪) 싸힌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한 실지경험담(實地經驗談), 아령조선군인(俄領朝鮮軍人) 김경천(金擎天)<ref name="donga"/>]]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말에는10월 [[고려혁명군]](사령관 [[김규식총재 이중집(북로군정서李仲執)|김규식]])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김경천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그를 인터뷰한 기사를 싣고 끝에 그가 지은 시 "시비리야벌!"을 소개하고 있다.<ref name="donga">[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23072900209206002&edtNo=1&printCount=1&publishDate=1923-07-29&officeId=00020&pageNo=6&printNo=1065&publishType=00020 빙설(氷雪) 싸힌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한 실지경험담(實地經驗談) 아령조선군인(俄領朝鮮軍人) 김경천(金擎天)] 1923.07.29. 동아일보 6면</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