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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ang Yun Portrait.jpg|thumb|200px|왕윤]]
'''왕윤'''(王允, [[137년]] ~ [[192년]] [[7월 4일]]([[음력 6월 7일|6월 7일]]))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로, 자는 '''자사'''(子師)이며 [[병주 (중국)|병주]](幷州) [[타이위안 시|태원군]](太原郡) 기현(祁縣) 사람이다. [[여포]](呂布)를 움직여 전횡을 일삼던 [[동탁]](董卓)을 죽였으나, 동탁의 하인 이각과 곽사의 반격을 받고 헌제 앞에서 죽는다.
 
== 생애 전반기 ==
 
왕윤은 절개가 있었기에 곽태(郭泰)는 왕윤을 두고 왕을 보좌할 재목으로 평가했다. [[155년]](또는 [[166년]]) 당시 왕윤은 태원의 관리였는데, 같은 태원 출신인 소황문(小黃門) 조진(趙津)은 자기 욕심을 채우는걸 우선시하고 마구 횡포를 부려 태원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왕윤은 [[태수]] 유질(劉瓆)의 명령을 받고 조진을 잡아들였다. 조진은 유질에 의해 처형당하였고, 이 때문에 원한을 품은 조진의 형제가 환관들을 통해 모함했기 때문에 유질은 감옥에 갇혔다가 죽었다. 왕윤은 유질의 유해를 평원으로 보내고 삼년상을 마친 다음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다<ref>《후한서》왕윤전에는 이 일이 왕윤의 나이 열아홉일 때 일어난 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에는 166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왕윤의 나이는 서른이므로 11년의 차이가 생긴다.</ref><ref>《후한서》 효환제기에 따르면, [[연희 (후한)|연희]](延熙) 9년([[166년]]) 9월에 남양태수(南陽太守) 성진(成瑨)과 유질(劉質)이 참언을 받아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졌다고 한다. 《후한서》 권30 열전 제20의 양해전에서는 남양태수 성진과 태원태수 유질(劉瓆)이 함께 주륙되었다고 하며, 또 [[사승]](謝承)의 《후한서》에 유질(劉瓆)은 평원군 사람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유질(劉質)은 왕윤의 상관 유질(劉瓆)과 동일인물인 것 같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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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탁 주살 ==
 
[[189년]] 하진은 왕윤을 하남윤(河南尹)으로 임명하였으며, 다시 태복(太僕)이 되었다. 하진과 [[십상시]]가 모두 죽고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190년]] 사도(司徒)가 되었다.(2월 1일)<ref>《[[후한서]]》 〈[[:s:zh:後漢書/卷9|제9권]]〉 “初平元年[...]二月[...]庚辰[...]太僕王允為司徒。”</ref>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어 [[뤄양|낙양]]을 위협하자, 동탁은 낙양을 불지르고 강제로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다. 왕윤은 정사를 잘 처리하고 겉으로 동탁에게 순종하는 척 하였기에 동탁은 왕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윤은 남몰래 동탁을 제거할 틈을 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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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
 
동탁의 잔당인 [[이각 (후한)|이각]](李傕) 등은 왕윤에게 용서를 빌었으나, 왕윤은 이를 거절했다. 궁지에 몰린 이각 일당은 [[가후]](賈詡)의 계책을 받아들여 군사들을 모아 장안을 공격하였다. 왕윤은 여포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했으나, 장안성 안에서 익주 출신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6월 1일 이각군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전황이 불리해졌다. 견디지 못한 여포는 왕윤에게 달아날 것을 권했으나 왕윤은 죽음을 각오하고 여포를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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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서의 왕윤 ==
 
동탁이 정권을 잡은 후 폭정을 일삼자, 왕윤은 자신의 생일에 여러 신하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하고 어지러운 현실을 한탄하였다. [[조조]](曹操)가 동탁을 죽이겠다고 나서자, 칠성보도(七星寶刀)를 주고 성공을 기원했다. 그러나 조조는 암살에 실패하여 진류(陳留)로 달아나 각지의 제후들과 함께 반동탁 연합군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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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재상}}
{{삼국지 주요 등장인물}}
 
[[분류:137년 태어남]]
[[분류:192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