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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환관]] 가문 출신이지만, 부친 [[조숭]](曹嵩)이 [[삼공]](三公)중 하나인 [[태위]](太尉)까지 올랐었고, 조조 자신도 군웅할거 중기에 두각을 나타내 [[헌제]](献帝)를 손안에 넣어 도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포]](呂布), [[원술]](袁術), [[장수 (후한)|장수]] 등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하남]](河南)에서 [[강소성]](江蘇省) 장강(長江) 이북에 걸친 지역을 지배했다.
 
한편 원소는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불리는 명문 출생으로 비록 노비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 청류파의 사상 정치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군벌화하여 [[한복 (후한)|한복]](韓馥), [[공손찬]](公孫瓚), [[장연 (후한 무장)|장연]](張燕), [[공융]](孔融) 등의 군벌들을 격파, 병합해 청(靑), 기(冀), 유(幽), 병(幷)의 4주(州 : 현재의 [[하북]], [[산서]], [[산동]])를 지배했으며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서 최고의 위세를 떨쳤다.
 
처음에 조조는 원소의 지원으로 인해 세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줄곧 조조는 원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조조의 독단적인 헌제 옹립을 계기로 완전히 원소와 결별했고 대립이 깊어져갔으며,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한 뒤 정병 10만을 선발하여 조조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참모 [[전풍]](田豊)과 원소군의 2인자 격에 위치에 있던 [[저수 (후한)|저수]](沮授) 등은 아군이 공손찬과 싸우느라 국력이 피폐해져 있고, 천자를 끼고 있는 군대를 치는 것은 의로움에 위배된다고 하여 원소의 출정을 만류했으나 당시 원소에게 크게 중용되고 있던 [[곽도]](郭圖) 등은 객관적으로 조조의 국력을 하북의 강역을 차지하고 있는 아군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며, 황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칼날이 역신 조조만을 향하는 것이므로 지지를 받을지언정 의로움에 위배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박했고 오히려 저수의 위세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탄핵했다. 원소는 이를 받아들여서 강대했던 저수의 권한을 삼분하고 저수와 곽도, [[순우경]](淳于瓊)이 각각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