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독립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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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회의 ==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가 아메리카 식민지를 지지하였고, 특히 프랑스는 해군과 육군을 파병하여 직접 군사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전쟁을 위해 너무 많은 돈을 써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게 되고, 결국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ref>{{서적 인용 |제목=The Pageant of World History | 저자= Gerald Leinwand |꺾쇠표 =예|연도=1986 |출판사=Allyn & Bacon |장=Chapter 14 The French Revolution and Napoleon: A Close Look at a Revolution |쪽= 322 |id={{ISBN
미국은 영국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조지 워싱턴]]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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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8월 27일]], 롱아일랜드에 상륙한 22,000명의 영국군은 독립 전쟁 중에서도 최대의 교전이 된 ‘[[롱아일랜드 전투]]’에서 대륙군을 몰아내고, [[브루클린 하이츠]]까지 후퇴시켰다. 하우는 거기에서 포위전을 시도했지만, 워싱턴 군은 모두 [[맨해튼]]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9월 15일]], 하우는 12,00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로워 맨해튼]]에 도착, 곧바로 뉴욕을 장악했다. 대륙군은 [[할렘 하이츠]]까지 물러났으며, 다음날 할렘 하이츠 전투가 벌어졌지만, 가까스로 진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우가 워싱턴 군 주위에 움직일 때 대륙군은, 또한 뒤로 후퇴한 뒤, [[10월 28일]]에 [[화이트 플래인스 전투]]가 벌어졌다.<ref>Fischer (2004), pp. 102–111</ref> 워싱턴 군은 후퇴를 거듭했기 때문에, 하우는 맨해튼으로 돌아 [[워싱턴 요새 전투|워싱턴 요새]]를 점령하고 2,000여명을 포로로 잡을 수 있었다. 포로의 수는 롱아일랜드 전투 때와 같이 3,000여명에 달했다. 이후 뉴욕에서 악명 높은 ‘감옥선’이 시작되었으며, 종전까지 이어졌다. 이 감옥선에서 독립 전쟁의 어떤 전투보다 많은 미합중국 군과 선원이 방치되어 죽어갔다.<ref>Stiles, Henry Reed. "Letters from the prisons and prison-ships of the revolution". Thomson Gale, December 31, 1969. {{ISBN
{{ISBN
찰스 콘월리스 장군이 워싱턴을 쫓아 뉴저지까지 진군하였고, 대륙군은 12월 초 [[델라웨어 강]]을 건너 펜실베이니아까지 후퇴했다. 뉴욕에서 뉴저지로 이어졌던 영국군 진격 작전도 겨울 들어 일단 정지하고 뉴저지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하우는 몇 번이나 소모전을 벌이며 대륙군을 잡을 기회가 있으면서도 실패했지만, 5,000명 이상의 대륙군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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