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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20일]]에 경운궁 숙옹재에서 대한제국 황제 한고종 광무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8월 8일]] [[의정부]] 의정서리 탁지부대신 [[조병식]]이 친왕봉호망단자(親王封號望單子)를 광무제에게 올렸고,<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친왕봉호망단자를 둘째 황자의 칭호는 의자, 셋째 황자는 영자를 쓰기로 하다|날짜=1900-08-08|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8008_003}}</ref> 궁내부대신 서리협판 [[윤정구]]는 황자의 정명단자(定名單子)를 상주하여 은(垠)으로 이름이 정해졌다.<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셋째 황자의 이름을 은 자로 정하다|날짜=1900-08-08|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8008_002}}</ref> 8월 17일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이은을 영친왕(英親王)으로 책봉하며 금책과 금인, [[면복|칠장복]]을 하사하였다.<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중화전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날짜=1900-08-17|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8017_001}}</ref>{{#tag:ref|책봉을 받는 사람에게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일종의 임명장인 책문(冊文)과 인장이 내려졌다. 책문과 인장은 책봉을 받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재질을 달리 하였다. 일반적으로 황제와 황후는 금책과 금보, 왕과 왕비는 옥책과 금보, 왕세자와 왕세자빈 등은 죽책과 금·은·옥인을 사용하였다. 존호를 올릴 때 왕과 왕비에게 옥책과 옥보를 올리고, 승하 후에는 옥책과 금보를 올렸다. 그러나 이 원칙이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았다.<ref>{{웹 인용|저자=이수미|제목=네이버캐스트 외규장각 의궤(3)|url=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92&contents_id=6010}}</ref>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변모하면서 제도와 문물이 황제국의 위상에 맞게 격상되어 황제에게 금·옥책과 금·옥보, 황태자에게 금책과 금보, 친왕에게는 금책과 금인을 사용하였다.<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이주영이 친왕 책봉 때의 금책과 금인을 쓰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다|날짜=1900-08-07|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8007_003}}</ref>|group="주"}} 한편 생모 궁인 엄씨는 이은의 출생 이후 1897년 10월 22일에 귀인,<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궁인 엄씨를 귀인으로 봉작하다|날짜=1897-10-22|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10022_001}}</ref> 1900년 8월 3일에 순빈(淳嬪)<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귀인 엄씨를 순빈에, 궁인 이씨를 소의에 책봉하다|날짜=1900-08-03|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8003_002}}</ref> 1901년 10월 14일에 순비(淳妃),<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순빈 엄씨를 순비로 책봉하다|날짜=1901-10-14|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3810014_001}}</ref> 1903년 12월 25일에 황귀비로 책봉되었다.<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순비 엄씨를 황귀비에 책봉하다|날짜=1903-12-25|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4012025_001}}</ref>
 
1902년에 [[대한천일은행]] (현재 [[우리은행]]) 제2대 은행장으로 이은이 임명되었고, 이를 보좌하기 위한 부장에 내장원경 [[이용익]]이 임명되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에서 영친왕 명의로 16주를 인수하고, 8000원을 자본금으로 납입함에 따라 총회에서 대주주인 영친왕이 은행장으로 추대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한국 근·현대 100년〉 탐구 5세 불과했던 영친왕 은행장 맡기도|저자=김상훈|출판사=문화일보|날짜=2006-01-14|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0135786}}</ref> 이은을 은행장으로 세운 것은 은행의 창립 초기에 기반을 확실히 다지기 위함이었다. 대한천일은행은 한성의 유력 상인들이 주도하고, 고종이 내탕금 3만원을 지원하면서 설립되었다. 이은의 은행장 취임과 더불어 주주와 자본금이 크케 늘어나 1901년에 주주가 24명에서 1905년에 51명으로 증가하였고, 자본금 5만 6천원도 모두 채울 수 있었다.<ref>{{뉴스 인용|제목=고종이 1899년 대한천일은행 설립 주도했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63380|출판사=경향신문|저자=권석천|날짜=2004-04-25}}</ref><ref>{{서적 인용|저자=박상하|제목=한국기업성장 100년史|출판사=경영자료사|연도=2013-5-16|id={{ISBN |8988922654}}}}</ref>
 
1906년 12월 7일부터 황족과 귀족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설치된 근대식 교육기관 [[수학원]]에서 강학을 받기 시작하였으며,<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궁내부 관제 중에서 수학원을 더 둘데 대한 사항과 관등 봉급령을 모두 비준하다|날짜=1906-10-23|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10023_001}}</ref><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영친왕이 강학을 시작하다|날짜=1906-12-07|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4312007_001}}</ref> 1907년 3월 11일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관례]]가 행해졌다.<ref>{{웹 인용|저자=고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영왕의 관례를 진행하다|날짜=1907-03-11|url=http://sillok.history.go.kr/id/kza_14403011_002}}</ref> 같은 해 8월 7일에 태황제 고종의 조서에 따라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황태자로 이은이 결정되었고,<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영왕 은을 황태자로 책봉하다|날짜=1907-08-07|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07_001}}</ref> 8월 16에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에 임명되었으며,<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를 육군 보병 참위에 임명하다|날짜=1907-08-16|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8016_001}}</ref> 9월 7일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를 책봉하고 축하를 받고 대사령을 반포하다|날짜=1907-09-07|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09007_001}}</ref>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의친왕]]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은 황태자의 종형, 이강은 순종의 동생이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ref>{{서적 인용|저자=오영섭|제목=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연도=2007-4-15|출판사=경인문화사|쪽=333 ~ 334|id={{ISBN |8949904780}}}}</ref>
 
1907년 10월 16일에 일본 황태자 [[다이쇼 천황|요시히토]]가 방한하자 순종과 함께 이은은 인천항에 갔으며, 요시히토와 동반하여 한성으로 돌아왔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일본국 황태자가 서울에 오다|날짜=1907-10-16|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0016_001}}</ref> 요시히토가 한성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숙소를 방문하였으며,<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가 일본국의 황태자를 이현 여관에서 소견하다|날짜=1907-10-17|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0017_002}}</ref><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가 일본국의 황태자를 이현 여관에서 소견하다|날짜=1907-10-18|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0018_001}}</ref> 요시히토와 함께 [[창덕궁]]과 [[경복궁]]을 관람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일본국 황태자가 창덕궁과 경복궁을 관람하다|날짜=1907-10-19|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0019_001}}</ref> 10월 20일에 요시히토가 귀국하자 순종과 함께 인천항에 나아가 송별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남대문역에 가서 자기 나라로 들어가는 일본국 황태자를 송별하다|날짜=1907-10-20|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0020_00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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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1월 13일에 순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임금의 처소를 창덕궁으로 옮기다|날짜=1907-11-13|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1013_001}}</ref> 같은 해 11월 19일에 황태자 이은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태자태사, 총리대신 이완용을 태자소사에 임명하여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를 일본국에 유학시키도록 명하다|날짜=1907-11-19|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1019_001}}</ref><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이완용을 태자 소사에 임명하다|날짜=1907-11-22|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1022_001}}</ref>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가 이은이 영민하니 일찍 신학문을 배워야 하며, 일본 황태자의 방한에 대한 답례로 일본으로 가야한다고 고종에게 강력히 요구하였다.<ref>{{저널 인용|url=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sa_001r_0060_0010_0430|제목=매천야록 제6권|저자=황현|날짜=1907}}</ref>
 
이은의 일본 유학에 [[경학원]] 학생 [[조대호]]와 서병갑(徐丙甲), [[엄주명]]이 동행하였다. 엄주명은 황귀비 엄씨의 조카이자 이은과 나이도 동갑인 절친한 사이여서 이은이 엄주명의 동행을 간청했고, 황귀비 엄씨의 뜻이 반영되어 엄주명의 동행은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ref>{{서적 인용|저자=정범준|제목=제국의 후예들|연도=2006-5-25|출판사=황소자리|id={{ISBN |8991508189}}|쪽=26}}</ref> 1907년 12월 5일에 한성을 출발하여<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가 일본으로 떠나가다|날짜=1907-12-05|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012005_001}}</ref> 12월 15일에 일본 도쿄 신바시(新橋) 정거장에 도착하였다.<ref>{{저널 인용|저자=大蔵省印刷局 編|제목=官報 宮廷錄事 韓國皇太子殿下御著京|날짜=1907-12-16|url=http://dl.ndl.go.jp/info:ndljp/pid/2950688/2|언어=ja}}</ref> [[시바 이궁]]에서 머물다가 1908년 2월 9일에 아자부 도리이자카(麻布鳥居坂)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저택 내에 어학문소가 설치되어 개인 교습을 받았다.<ref>{{서적 인용|제목=황태자의 동경 인질살이|저자=송우혜|출판사=푸른역사|쪽=238 ~ 242|연도=2010|id={{ISBN |8994079416}}}}</ref> 같은 해 8월에 일본 [[긴키 지방]]을 여행하였다.<ref>송우혜, 위의 책, 286쪽.</ref> 1909년 7월 27일에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를 황태자의 유학을 담당하는 보육총재로 임명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일본국 천황이 이토 히로부미를 우리 황태자의 유학기간 보육 총재에 임명하다|날짜=1909-07-27|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7027_001}}</ref> 같은 해 8월에 일본 [[도호쿠 지방]]을 여행하였으며,<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가 일본 동북 지방을 순행하다|날짜=1909-08-18|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8018_001}}</ref> 9월 8일에 대한제국 육군 보병 부위에 임명되었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를 육군 보병 부위에 임명하다|날짜=1909-09-08|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09008_002}}</ref> 1909년 10월 26일에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피격당하여 사망하자<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이토 태사가 안중근에게 피살되다|날짜=1909-10-26|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10026_001}}</ref> 메이지 천황은 같은 해 11월 17일에 [[이와쿠라 도모사다]]를 보육총재로 임명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일본국 천황이 이와구라 도모사다를 황태자의 유학 기간 보육 총재에 임명하다|날짜=1909-11-17|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211017_001}}</ref> 1910년 5월에 [[나고야]]에 가서 공진회를 관람하였고,<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가 나고야에 나아가 공진회를 보다|날짜=1910-05-08|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305008_001}}</ref> 같은 해 7월에는 일본 [[산인도]]와 [[산요도]] 지방을 여행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황태자가 일본국 산음, 산양 지방을 돌아보다|날짜=1910-07-13|url=http://sillok.history.go.kr/id/kzb_10307013_001}}</ref>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8월 29일에 공포된 메이지 천황의 조서에 따라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었으며, 이은도 황태자에서 왕세자가 되어 일본 황족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대일본 천황이 조서를 내리다|날짜=1910-08-29|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308029_001}}</ref> 1911년 1월 9일에 [[학교법인 가쿠슈인|학습원]] 중등과 1학년에 입학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중등과 1학년에 입학하다|날짜=1911-01-09|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1009_002}}</ref> 같은 해 7월 20일에 황귀비 엄씨가 사망하자<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귀비 엄씨가 덕수궁의 즉조당에서 돌아가시다|날짜=1911-07-20|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7020_002}}</ref> 7월 23일에 일본에서 귀국하여<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동경에서 귀국하자 귀비의 장례에 가다|날짜=1911-07-23|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7023_003}}</ref> 장례에 참석한 후<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산소에 가서 현실을 내릴 때 받들어 하직하다|날짜=1911-08-02|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8002_005}}</ref> 8월 5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총독 백작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함께 왕세자가 동경에 가다|날짜=1911-08-05|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8005_002}}</ref> 그 해 8월 26일에 [[육군유년학교 (일본)|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의 시험을 치르고,<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육군 중앙 유년 학교의 시험을 치다|날짜=1911-08-26|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8026_001}}</ref> 9월 1일에 예과 2학년으로 편입하여<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에게 유년 학교 예과에 입학한 것을 축하하는 전보를 보내다|날짜=1911-09-01|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409001_001}}</ref> 1913년 7월 10일에 예과를 졸업하였고,<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유년 학교 예과를 졸업하다|날짜=1913-07-10|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607010_002}}</ref> 1915년 5월 28일에 본과를 7등으로 졸업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왕세자의 성적, 유년학교를 7번으로 졸업|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150518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15-05-18}}</ref><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육군 중앙 유년 학교를 졸업하다|날짜=1915-05-28|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805028_001}}</ref> 1915년 6월 1일부터 사관후보생으로 근위 보병 제2연대 제9중대에서 복무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근위보병연대에 입대하실 이왕세자전하|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150525u00_03.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15-05-25}}</ref> 같은 해 11월 28일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제29기생으로 입학하였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내일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한다는 뜻을 양궁에 전보로 알리다|날짜=1915-11-27|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0811027_001}}</ref> 1917년 5월 25일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으로 근위 보병 제2연대 제12중대에 소속되어 근무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왕세자 어졸업, 우등의 성적으로|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170527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17-05-27}}</ref> 6개월의 견습 기간을 마치고, 같은 해 12월 25일에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육군소위에 임관되시는 이왕세자 전하|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171225u00_03.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17-12-25}}</ref> 1918년 1월 13일에 귀국하였다가<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귀국하니 석조전에서 만찬회를 열다|날짜=1918-01-13|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101013_001}}</ref> 1월 26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동경의 별저로 돌아가다|날짜=1918-01-26|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101026_001}}</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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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8월 3일에 조선과 일본의 각 신문에 이은과 일본 황족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약혼 기사가 실렸다. 이 결혼은 한일 병합 이전부터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계획되어 이완용과 합의까지 된 사항이었고,<ref>{{서적 인용|저자=한명근|제목=한말 한일병합론 연구|연도=2002|출판사=국학자료원|쪽=53}}</ref> 병합 이후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궁내대신 [[하타노 요시나오]]의 협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언론에 발표된 것이다.<ref>{{서적 인용|저자=坂元眞一|제목=조선왕실 자손들과 그 대한민국 국적 - 왕공족의 법적신분과 그 등록을 중심으로|연도=1999|기타=서울국제법연구 6|쪽=175}}</ref>
 
당시 [[일본 황실]]의 제도와 구성에 대해 정하는 법률인 《[[황실전범]]》(皇室典範)의 제39조에 의하면 “황족의 결혼은 동족 또는 칙지에 따라 특별히 인정된 화족에 의한다.”고 규정되어 있어 일본 황족과 조선 왕족의 결혼은 불가능하였고, 이은과 마사코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황실전범》의 개정이 필요하였다. 결국 1918년 11월 28일에 “황족 여자는 왕족 또는 공족에게 시집갈 수 있다.”는 《황실전범증보》(皇室典範增補)가 제정되었다.<ref>{{서적 인용|저자=스즈키 마사유키|제목=근대 일본의 천황제|연도=1998|출판사=이산|쪽=114 ~ 115|id={{ISBN |8987608050}}}}</ref>
 
1918년 12월 5일에 혼인을 인정하는 [[다이쇼 천황]]의 칙허가 발표되었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의 가례를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왕의 딸 방자여왕으로 정하다|날짜=1918-12-05|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112005_001}}</ref> 같은 해 12월 8일에 약혼을 의미하는 납채의식이 행해졌고, 12월 11일에는 이은의 저택에서 약혼자와의 첫 대면이 있었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5) 결혼 준비|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51900329203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5-19&officeId=00032&pageNo=3&printNo=11889&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5-19}}</ref>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1월 21일에 고종이 승하하자 연기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7) 고종 승하|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523003292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5-23&officeId=00032&pageNo=9&printNo=1189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5-23}}</ref>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은은 1919년 1월 24일에 귀국하였다가<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동경에 돌아와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다|날짜=1919-01-24|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201024_001}}</ref> 3월 10일에 일본으로 돌아갔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동경의 별저로 돌아가다|날짜=1919-03-10|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203010_002}}</ref> 1920년 4월 27일에 중위로 진급하였고,<ref name="중위">{{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육군 보병 중위에 임명되고 대훈위에 서임되어 국화 대수 훈장을 받다|날짜=1920-04-27|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304027_003}}</ref> 4월 28일에 도쿄 이은의 저택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ref>{{웹 인용|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제목=왕세자가 토쿄 가스미가세키이궁에서 친영례과 합근식을 거행하다|날짜=1920-04-28|url=http://sillok.history.go.kr/id/kzc_11304028_002}}</ref> 결혼식 당일에 마사코가 타고 있던 마차로 유학생 서상일(徐相日)이 사제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고,<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12) 신혼 생활|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60400329209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6-04&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02&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6-04}}</ref>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이은의 결혼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본으로 선전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조선총독부|제목=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유고|연도=1920-4-28|기타=조선총독부 관보 호외}}</ref>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은 이은을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禽獸)이며 적자(賊子)라고 비난하였다.<ref>{{뉴스 인용|출판사=독립신문||날짜=1920-05-08|url=http://search.i815.or.kr/OrgData/OrgList.jsp?tid=ns&id=DR192005080101|제목=최후의 정죄 (은의 취구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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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i Un & Yi Bangja at the National Art Exhibition.jpg|thumb|200px|제국미술원전람회 조각진열장을 둘러보는 이은과 마사코 (1933)]]
참모본부 부원 겸 조선군사령부 소속으로 있다가<ref>{{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소좌로 진급|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80716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8-07-16}}</ref> 1928년 8월 11일에 소좌로 진급하여 근위 보병 제2연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어영진 육군소좌로 근위대 대장 인정전에서 수하|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80812u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8-08-12}}</ref> 1929년 8월에 제1사단 관할 보병 제1연대 소속으로 전보되었으며,<ref>{{뉴스 인용|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9-08-03|제목=이왕전하 전보 보병 제1연대부로|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90803u00_01.pdf}}</ref> 1930년 12월 22일에 교육총감부로 전임되었다.<ref>{{뉴스 인용|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0-12-23|제목=이왕전하 전임 교육총감부에 출임|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01223y00_01.pdf}}</ref> 1932년 6월 24일에 중좌로 진급하였고,<ref>{{뉴스 인용|제목=육군보병중좌로 이왕전하 어승진|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20626y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2-06-26}}</ref> 1933년 4월에 교육총감부 과원으로 보임되었으며,<ref name="항공"/> 1935년 7월 22일에 대좌로 진급되면서 우츠노미야(宇都宮) 보병 제59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황왕족 3전하 지방부대 어전보 이왕전하 대좌로|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50723v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5-07-23}}</ref> 1936년에 육군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킨 [[2·26 사건]]이 발생하자 이은은 진압 명령을 받아 제59연대 병력을 이끌고 도쿄로 갔다가 반란 부대가 해산하면서 원대로 복귀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김을한|제목=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연도=2010-08-15|출판사=페이퍼로드|쪽=140 ~ 142|id={{ISBN |8992920458}}}}</ref> 1937년 3월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에 육군사관학교 예과 교수부장에 임명되었다.<ref name="항공"/> 1938년 2월에 북지나방면군사령부 소속으로 전임되었고,<ref name="항공"/> 같은 해 7월 15일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육군소장으로 이왕전하 어진급|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380716y00_02.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38-07-16}}</ref> 1939년 8월에 근위 보병 제2여단장에 임명되었다가 1940년 8월에 오사카 제4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ref name="항공"/> 같은 해 12월 2일에 육군 중장으로 진급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육군정기대이동|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01203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0-12-03}}</ref> 1941년 7월에 제51사단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6일에 교육총감부 소속으로 전임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이왕은전하 어영전 교육총감부로|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1-11-07|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11107y00_01.pdf}}</ref> 1942년 8월 1일에 제1항공군사령부에 소속되어<ref>{{뉴스 인용|제목=이왕은전하 어전보 항공군사령부부에|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20802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2-08-02}}</ref> 1943년 7월 20일에 제1항공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ref name="항공">{{뉴스 인용|제목=이왕전하 어친보 항공군사령관에|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30721y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3-07-21}}</ref> 1945년 4월 1일에 군사참의관으로 전임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군사참의관에 이왕전하 어영전|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450403v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45-04-03}}</ref>
 
이은은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후부터 조선의 문화재 보존의 필요성을 느끼고, 조카 [[이우]] 등을 통하여 민요와 창극이 수록된 레코드판, 문화재와 민속품을 구해오도록 부탁하였다. 1938년에 귀국하였을 때에는 [[화신백화점]]을 직접 방문하여 문화재를 구매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세월이여 왕조여 조선조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회고록 (46) 태평양 전쟁 발발|url=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082700329209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08-27&officeId=00032&pageNo=9&printNo=11974&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저자=이방자|날짜=1984-08-27}}</ref> 이은은 일본 근대 서양화 작품들도 일본제국미술원장 [[마사키 나오히코]]와 도쿄미술학교장 [[와다 에이사쿠]]의 추천을 받아 수집하였다. 나오히코의 일기 《십삼송당일기》(十三松堂日記)에 따르면 이은은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집을 거부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이 수집품들은 1930년대 일본 근대 서양화 작품에서도 최고 수준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왕가 미술관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f>{{뉴스 인용|제목=영친왕 서양화 컬렉션, 일본도 비상한 관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2378698|날짜=2008-11-14|저자=이민정|출판사=뉴시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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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l.ndl.go.jp/#kanpo 《관보》], [[일본 대장성]] 인쇄국
* 《李王同妃兩殿下御渡歐日誌》, 李王職 編(1928), 李王職.
* 《근대 일본의 천황제》, 스즈키 마사유키(1998), 이산, {{ISBN |8987608050}}
* 〈조선왕실 자손들과 그 대한민국 국적〉, 《서울국제법연구 6》, 坂元眞一(1999).
* 《東京の近代建築》, 後藤治·三船康道(2000), 地人書館.
* 《한말 한일병합론 연구》, 한명근(2002), 국학자료원.
* 《皇室の邸宅》, 鈴木博之(2006), JTBパブリッシング.
* 《제국의 후예들》, 정범준(2006), 황소자리, {{ISBN |8991508189}}
*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 오영섭(2007), 경인문화사, {{ISBN |8949904780}}
*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김을한(2010년), 페이퍼로드. {{ISBN |8992920458}}
* 《황태자의 동경 인질살이》, 송우혜(2010), 푸른역사, {{ISBN |8994079416}}
* 《역사비평》 91호, 2010년 여름호.
* 《한국기업성장 100년史》, 박상하(2013), 경영자료사. {{ISBN |898892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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