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주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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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1927년 2월 일본군이 [[석두하자]]의 신민부 본부를 타격하여 [[김혁]], [[유정근]] 등이 체포되면서 신민부는 세력이 약화되었고, 향후 대책논의에 있어 무장투쟁 지속을 주장하는 군정파와 민중자치를 주장하는 민정파로 분열되었다. 군정파는 [[김좌진]]을 위원장으로 하는 지도부를 독자적으로 꾸렸고, 민정파는 민정파대로 [[고려국민당]]을 창당해 따로 놀기 시작했다. 군정파는 무장투쟁을 주장했던 만큼 세금 수취를 계속했다. 참다 못한 빈주현 주민들이 세금을 더 이상 내지 않기로 하고 신민부 보안대가 들이닥칠 경우 어떻게 자위책을 마련할 것인지 대책회의를 마련했다. 이 정보를 들은 보안대원 이백호 등 수 명이 빈주를 습격, 회의장에 총기를 난사했다. 회의 개최자 [[황혁]]을 비롯해 유연동, 김봉진 등은 즉사하고 윤필한, 김유문, 장문숙 등은 중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주민들도 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재만 한인 사회에서 신민부와 그 지도자 김좌진의 평가는 추락했다. 11월 하순 영안현에서 [[최경한]] 등의 주도로 개최된 "북만주민대회"에서 6개 현 16지역의 한국인들이 모였다. 대회 참여자들은 김좌진의 죄악을 열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궐석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된 김좌진은 1930년 1월 사회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일본 본국에 보낸 1930년 2월 27일자 보고서에서는 빈주사건 피해자 유족들이 [[재중청년동맹]]과 함께 김좌진의 살해를 계속 계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