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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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개신교'''(改新敎) 또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ism)는 16세기 [[종교 개혁가|교회의 개혁가]]들의 [[종교개혁]]을<ref>{{웹 인용|url=http://www.oxforddictionaries.com/definition/english/Protestant|title=Protestant - Definition of Protestant in English by Oxford Dictionaries|website=Oxford Dictionaries - English}}</ref> 통해 생겨난 기독교의 한 전통이다. 11세기 [[동서 교회의 분열]]을 통해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가 분리되었고, 이후 16세기 서방교회내에서 [[종교 개혁]]을 통해 천주교회와 개신교가 분리되면서 기독교의 가장 주된 사상과 종파인 정교회, 천주교회, 개신교회가 형성되었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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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신교회의 전통 ==
개신교회가 등장하며 새롭게 조명된 교회 [[전통]]과 새롭게 형성된 교회의 역할을 개신교회의 전통으로 보며, 교회구조 이해, 성찬식의 변화, 교회학교, 성경 연구, 사회운동에서 사회제도까지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종교적 사안인 교회 전통으로만 좁혀서 성찬 예식, 교회 구조, 성직자 이해, 성경 연구만을 범위로 살펴본다.
 
=== 교회구조 ===
개신교회의 등장으로 [[서방교회]]에 계급적 교회구조에서 [[공교회]]구조의 재조명, 새로운 구조의 교회가 등장하였다. 계급적 획일성을 벗어난 [[다양성]]을 지닌 기독교 교회가 나타났다.
 
공교회 구조의 재조명, [[서방교회]] 즉 [[로마교회]]의 절대적 계급주의의 교회구조에서 벗어났다. 종신제가 아닌 감독(주교)과 대감독(대주교)가 임기제인 연합구조의 교회조직을 강조하는 공교회구조로 재조명하였다. 초기 [[종교개혁]] 교단이었던 [[루터교회]]와 영국[[성공회]]는 전통적 [[공교회]]제도를 수용하며, 절대적 대감독(대주교)가 아닌 연합적인 공교회(보편교회) 구조의 교회로 되돌아가도록 노력하였다. 이는 이후 등장한 [[감리교회]]나 [[구세군]], [[오순절]] 교회 일부에서도 감독들은 임기제로 선발되고, 공교회 감독의 임무를 따라 수행하는 [[초대교회]]의 구조를 재형성하고자 하였다.
 
새로운 교회구조로 원로구조의 교회가 등장하였다. 원로나 장로를 선발하여 그 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소명이 있는 이가 [[목사]]의 역할을 하는 원로구조의 교회 구조가 [[칼뱅]]에 의해서 형성되기 시작했고,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성결교회]], [[오순절]] 교회 일부 등에서 이를 따라 교회 구조를 형성하였다.
 
회중제도의 교회가 형성되었다. 영국성공회의 감독 중심 교회가 공교회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더욱 신도을 회중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회중을 중심으로하는 교회로서 이중에 원로 또는 장로를 선발하여 목사의 역할을 맡기는 구조의 회중제도 교회가 시작되었고, [[회중교회]], [[침례교회]], [[그리스도교회]] 등이 이런 구조를 따른다.
 
=== 성찬 예식의 회복 ===
[[성찬]]은 개신교회에서 상시적 [[ 예배]] 예전으로 회복하였다. 기독교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말씀의 성례와 함께 성찬의 성례는 예배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성찬]]은 11세기 이후 서방교회인 로마교회에서 계급적 방식으로 변화하였고, 철저한 성직자 중심의 예식으로 변화하였다. [[천주교회]]의 성찬 예식은 20세기까지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성도를 등에 지고, [[예전]]이 진행되는 동안 성도들을 향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직자]]의 참여만이 있고 포도주를 성직자가 마신 이후 빵만을 나눌 때 성도를 향해 섰다.
 
개신교회의 [[성찬]]은 [[성도]]와 성직자가 동등하게 참여하고 나누는 상시적 [[예전]]으로 회복하였다. [[종교개혁]] 시기인 16세기부터 개신교회의 성찬은 성직자와 성도가 알아듣는 해당 지역 언어로 진행하였고,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어 먹고, 성찬 예전을 거행하는 동안에도 성직자는 예배당 [[십자가]]를 등에 지고 성도들 향해 서서 성찬 예전과 축사를 하였고, 마칠 때까지 성도들을 바라보았다. 이는 개신교회의 전통이 되어 성찬 탁자에 [[십자가]]가 놓이고, 포도주와 빵이 놓이는 모습의 개신교회 성찬대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다양한 형식의 성찬 예전이 풍성하게 발전하였고, [[성찬]] 관련 [[목회신학]]적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이후부터 성찬을 회복하기 위해서 16세기 특정 절기만 거행하던 천주교회의 성찬 방식을 거부하고, 복음을 전하는 예배로서 성찬과 성도의 요청에 의해 성찬예전을 상시적으로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개신교회의 대부분 [[교단]]은 [[성찬]]을 한 달에 한번 이상을 요구하며, 매주 거행할 것을 요구하는 [[교단]]도 있다. 이로 인해 [[성찬]]의 변화와 [[예배]]의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였고, 예배당만이 아니라 성도들이 있는 곳에서 성직자가 언제나 거행할 수 있는 예배가 되었다. 현재도 개신교회의 일부 교단에는 성도들이 [[성찬]]을 요청할 경우에는 성직자는 [[성찬]]이 포함된 예배를 함께 드려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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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직자 이해 ===
개신교회이 성직자는 [[목사]]<ref>국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 개신교회 중 하나인 대한성공회는 신부라 한다. 일본의 성공회는 목사라 한다.</ref>이다. 성직자의 이해는 12세기 이전부터 서방교회에서 16세기 [[종교개혁]] 전에는 귀족과 유사한 지위를 누렸으며, 성도과 성직자는 엄격한 계급적 관계로 인식하였다. 개신교회의 성직자인 목사는 성도와 평등적 관계의 시각에서 시작된 성직자 이해이다.
 
개신교회는 [[목사]]의 직분을 거룩한 사명으로 인식한다. 이 사명에 대한 관점이 교단마다 차이가 있으나 성도와 목사는 계급적 관계가 아니라, 자격이나 직무의 차이로 인식한다. [[공교회주의]]를 따르는 교단들에서는 [[목사]]의 자격을 지닌 것으로 보며, [[개혁주의]]를 따르는 교단들에서는 직무의 차이로 인식한다.
 
이는 절대적 신분제도를 거부하는 평등적 관계를 전제로 하며,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동등한 하나님의 성도이며, 똑같은 피조물임을 밝히는 성직자 이해이다.
 
=== 성경연구 ===
[[서방교회]]는 16세기까지 [[성경]]과 [[교회 전통]]에서 교회전통을 강조하는 신학적 견해를 보였다. [[교리]]와 칙령에 따라 규정된 규범을 따른 [[교회법]]이 뿌리를 두는 전통을 강조하였다.
 
개신교회는 [[성경]]과 [[교회전통]]에서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교회의 문을 열었다.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종교개혁]]의 전통적 복음주의 사상을 뿌리로 한다. 따라서 개신교회는 성경을 기존 [[교리신학]], 즉 [[조직신학]]적 측면으로 접근하지 않고, 교리의 증빙자료 측면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성경 자체가 전하는 복음을 찾고자 성경 저자의 의도와 작성된 시대, 시대배경, 본문의 구조 등을 연구하여 [[성경]]이 직접적으로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로 [[교리신학]]의 일부였던 성경연구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으로 발전하였다. 문헌과 본문연구, 역사적 배경, 문체, 구조를 연구하는 다양한 성경 연구 기법이 나타났으며, 깊이 있는 현대의 성경 해석, 셩경 주석의 핵심적 이론과 방법이 개신교회의 성경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현대의 [[천주교회]]와 [[정교회]]의 성경연구 역시 개신교회가 형성한 성경연구 기법을 바탕으로 이뤄지며, 다양한 연구 교류가 [[교파]]를 넘어 이뤄지고 있다.
 
== 개신교의 기원과 용어 ==
'개신교(改新敎)'라는 표현은 고칠 개(改)와 새롭게 할 신(新)을 쓴 한자어 표현 즉 종교개혁 전통을 강조한 표현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개신교’의 의미로 생각하고 사용하나, ‘기독교(基督敎)’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교'를 한자로 번역한 말이기 때문에 개신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등과 함께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모든 종교들을 일컫는 말이다. 또 개신교도를 16세기에 칭하던 용어인 '복음주의자', '복음주의'(Evangelicalism)를 개신교로 사용하기도 한다. 유럽지역에서 사용하는 '에반겔리세'(Evangelische)라는 용어는 개신교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16세기 전통 복음주의와 19세기에 영미의 보수적 개신교회가 중도 및 진보적 개신교회와 분리하기 위해서 자칭하는 용어에서 등장한 '신복음주의'([[복음주의]])<ref>19세기 보수적 교단이 자신들이 개신교 정통이며, 개신교회의 중도 및 진보적 성향의 교단둘은 개신교의 16세기 복음주의를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였다.</ref>와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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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후터라이트|설명=또한}}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더 나아가 급진적 재침례파와 평화주의 재침례파로 나눈다. 급진적 재침례파는 "새 예루살렘"을 땅 위에 건설하기 위해 폭력 동원을 인정했다. 급진적 재침례파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 [[뮌스터 반란]]이다. 그에 반해 [[신약성서]]에 근거한 [[비폭력주의]]를 주장하는 평화주의자들은 [[메노나이트]](Mennonites)의 기원이 된다. 다시 말해, 원래 메노나이트의 기원은 [[네덜란드]] [[로마 가톨릭교회]] [[신부 (기독교)사제|신부]]인 메노 시몬스(Menno Simons)가 두 부류의 전통적인 재침례파인 평화적인 오비파(Obbenites)와 급진적인 호프만파(Melchio Hoffman)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라 자부하는 자가 영적인 무기는 내려두고 세속적인 것을 취하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이 부합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며 [[평화주의]]자인 오비파 쪽으로 가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이후에 그곳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의 추종자들을 그의 이름을 따서 메노나이트라 부르게 되었다.<ref>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Vol. III, Abingdon Press, 1975, p.86</ref> 메노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폭력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5시간만에 읽는 쉽고 재미있는 교회사》|저자=유재덕 지음|출판사=작은행복}}</ref>
한 번 받은 세례(특히 유아 세례)를 무효라고 주장하는 교리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여러 교단에게 이단으로 취급되어 [[1600년]]까지 무려 1만여 명의 [[순교자]]들이 생겼으며, [[1930년]]에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후터라이트(재침례파의 일파)공동체인 부르더호프 공동체가 [[영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현재는“재침례파가 21세기 개신교가 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ref>[http://www.hani.co.kr/section-009100020/2003/04/009100020200304102007472.html한겨레신문 2003년 4월 10일자 "평화교회 재세례파(재침례파)는‥"]</ref>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