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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불교에 심취하여 401년 후량에 머물고 있던 [[구마라습]]의 신병을 확보하여 장안으로 데려왔다. 요흥은 구마라집을 국사로 삼고 각지에 사원을 건설하였다. 또한 불경을 번역하게 하고 대승정(大僧正)을 임명하기도 하였다.
 
[[405년]] 말, [[동진]](東晉)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 (송)|유유]](劉裕)가 한수 일대의 12개 군을 송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를 승락하였다. [[406년]]에는 남량에 양주(凉州)의 수도 고장(姑臧)을 빼앗겼으며 사실상 남량, 북량, 서량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407년]]에는 [[혁련발발|유발발]](劉勃勃)이 반란을 일으켜 [[하 (오호십육국)|하]](夏)를 건국하는 등 내분에 시달리기 시작하였다. 후진은 하와 장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계속 쇠퇴하였다. [[409년]]에는 멸망시켰던 걸복부의 서진이 독립하였고 구지도 자립하였다. [[410년]]에는 [[후촉 (오호십육국)성한|후촉]](後蜀)과 연합하여 동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이에 요흥은 [[413년]]에 북위와 인척 관계를 맺어 대응하려 하였다.
 
그러나 요흥이 병으로 쇠약해지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후진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요흥이 총애하던 아들 요필(姚弼)은 권력을 잡으려 [[414년]]에 모반을 일으켰으나 요흥이 병에서 회복되자 실패하였다. 그러나 요흥은 요필을 처벌하지 않았고, [[415년]]에 다시 요흥이 병으로 쓰러지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도 진압되었고 요필은 장안 성내에 유폐되었다. [[416년]], 요흥의 임종이 가까워오자 요필의 도당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요흥은 병든 몸을 이끌고 나서 이 반란을 진압하고 요필을 처형하여 후계자 다툼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