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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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필요|날짜=2015-08-04}}
{{군인공직자 정보
|이름 = 원소
|원래 이름 = 袁紹
|생애= ? ~ [[202년]] [[음력 5월 21일]]
|그림 = Yuan Shao Portrait.jpg|thumb|230px
|그림설명 =
|태어난 곳= [[하남군|하남윤]] [[낙양|낙양현]] (본적은 [[여남군]] 여양현)
 
|죽은 곳= [[위군]] [[업 (지명)|업현]]
|최종국가 계급= [[대장군후한]]
|직책 = [[기주]][[주자사|목]]
|지휘=
|임기 = 191년-202년 6월 28일
|주요 참전 전투/전쟁 =[[십상시의 난]],<br />[[동탁 토벌전]],<br />[[관도대전]]
|전임 = [[한복 (후한)|한복]]
|후임 = [[원상]]
|군주 = [[후한 헌제]]
 
|직책2 = [[사예교위]]
|직책3 = [[거기장군]]
|임기3 = 190년-191년 (자칭)
|전임3 =
|후임3 =
 
|직책4 = [[발해군|발해태수]]
|임기4 = 190년
 
|출생일 = 불명
|태어난출생지 = [[하남군|하남윤]] [[낙양|낙양현]] (본적은 [[여남군]] 여양현)
|생애사망일 = ?202년 ~6월 [[202년]]28일 [[(음력 5월 21일]])
|죽은사망지 = [[위군]] [[업 (지명)|업현]]
|거주지 =
|본관 =
|학력 =
|경력 =
|정당 = [[청류파]]
|소속 =
|부모 = [[원성]]과 그 천첩
|형제 =
|배우자 =
|자녀 =
|종교 =
|별명 = '''자:''' 본초 (本初)
|서명 =
|서훈 =
|웹사이트 =
 
|신장 =
|체중 =
|혈액형 =
 
<!-- 이하 군경력 변수는 변수 중 하나 이상이 채워져야 화면에 나타남 -->
|군복무 = [[후한|한나라]] → 독립 군벌화
|복무기간 = 186년-202년
|소속군대 =
|계급 = [[대장군]] (196년)
|지휘 =
|근무 =
|참전 =
{{접이식 목록|제목=[[후한말]]|
* [[흑산적의 난]]
* [[십상시의 난]]
* [[동탁 토벌전]]
* [[계교 전투]]
* [[역경 전투]]
* 관도 전역
** [[두씨진 전투]]
** [[백마 전투]]
** [[연진 전투]]
** [[관도 대전]]
** [[창정 전투]]
}}
}}
'''원소'''(袁紹, 미상 ~ [[202년]] [[6월 28일]]([[음력 5월 21일]]))는 [[후한]] 말기의 군인으로, [[자 (이름)|자]]는''' 본초'''(本初)이며 [[여남군]]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명문가의 사생아 출신으로 젊어서는 [[청류파]] 사상가로 명성을 떨쳤다. 후한의 정치적 부패를 타파하고자 [[십상시]]를 일소하였으나, [[동탁]]의 개입으로 정권을 잡는 데 실패하고 중앙에서 쫓겨났다. 원래는 중앙에서 태어난 관료 출신이었지만 사상가·정치가로서의 명망과 경력을 바탕으로 [[기주]] 일대에서 빠르게 군벌화하였고, [[한복 (후한)|한복]]·[[공손찬]]·[[장연 (평북장군)|장연]]·[[전해]]·[[공융]] 등의 정부 관료·군벌들을 격파·병합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조조]]에게 패한 뒤([[관도대전]]) 202년에 병으로 죽었다. 후계자 [[원상 (후한)|원상]]은 종형 [[원담]]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난 사이에 조조에게 토벌되었다.
 
후계자 [[원상 (후한)|원상]]은 종형 [[원담]]의 반발로 내전이 일어난 사이에 조조에게 토벌되었다.
 
== 생애 ==
===영제기: 청류 지식인으로서의소장파 전반기명사 ===
원소는 고조부 [[원안]](袁安) 이후 4대 연속 [[:wikt:삼공|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던 명문 가문 출신으로, 용모가 수려하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어려운 일을 잘 도와주어 젊어서부터 지도자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사세삼공(四世三公)의 적장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로 그려지나, 태어날 때 부친인 [[원성]](袁成)이 죽어 유복자로 자랐으며 모친은 노비였다.<ref>한편으로는 [[원봉 (후한)|원봉]](袁逢)의 차남이고, 일찍 죽은 [[원성]]의 양자로 입적되었다는 설도 있다. ([[진수 (서진)|진수]](3세기), 《[[삼국지]]》 〈[[:s:삼국지 (진수)/권6|권6]]〉 〈원소전〉의 [[배송지]] 주석 중 “紹即逢之庶子,術異母兄也,出後成為子。” (원소는 원봉의 서자인데, 이복 형에게 술수를 써서, 출생 후에 원성(袁成)의 아들이 되었다. ))원소가 서자라는 기록은 양쪽 설 모두 동일하다.</ref> 원소는 천출이었으므로 비록 [[효렴]](孝廉) 등의 천거를 받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에 당시 삼공의 눈에 들어 삼공부로부터 직접 벽소되는 상당히 파격적인 절차로 20세의 나이에 복양장(濮陽長)으로 부임하였다. 임지에서는 깨끗한 정치로 명성을 얻었으나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적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복상이 끝나자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것을 추감하며 또다시 3년의 상을 치르는 한편 이후에도 병을 핑계로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당시 후한에서는 삼년상을 치르는 관습이 거의 없었던 점과, 어려서 고아가 된 일을 추감하여 원소만이 다시 복상을 거친 것은 당시에는 그가 유일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청렴하고 올바른 정치를 추구했던 원소는 후한 말의 부패한 정치 현실에 대해 적잖이 실망하여 벼슬길을 피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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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원소는 학행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아 시어사(侍御史)로 승진하였으나, 사이가 나빴던 종제 [[원술]](袁術)이 상서대에 있었으므로 사직하고 무관직으로 전임해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이 되었다. [[186년]]([[중평]](中平) 3년)에는 [[갑훈]](蓋勳)·[[유우 (후한)|유우]](劉虞)와 같이 금병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십상시 주살을 도모하였으나, 갑훈이 경조윤(京兆尹)으로 전출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 소제기: 맹진 방화조작사건과 십상시의 난 ===
[[189년]](중평 6년), 영제가 붕어하고 [[하진]]이 집권하여 환관들과 대립하자 원소는 [[하진]]에게 접근하여 환관을 주살할 계획을 세워 [[하진]]에게 바쳤다. [[하진]]은 처음엔 원소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나 누이동생 [[하태후]](何太后)의 반대와 설득에 마음이 돌아선데다가 그 스스로가 환관과 결탁하여 출세한 것이었으므로 쉽게 포기하고 말았다. 이에 원소는 재차 [[왕광 (후한)|왕광]](王匡)·[[정원 (후한)|정원]](丁原)·[[교모]](喬瑁)·[[동탁]] 등 지방의 장수들을 수도 근교로 소집하여 하태후를 비롯한 환관들의 지지세력을 협박하는 계책을 세웠고 다시 [[하진]]을 설득하여 [[왕광 (후한)|왕광]]에게 강노수 5백을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오도록 하는 한편 [[교모]]는 성고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동탁]]은 관중(關中)으로 오도록 하고, [[정원 (후한)|정원]]을 시켜 흑산적으로 위장하여 맹진(孟津)을 불태운 다음 흑산적 소탕을 구실로 삼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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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소는 정권을 잡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혼란을 틈타 [[동탁]]이 낙양에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와서 황제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였던 [[후한 소제 (13대)|소제]](少帝)는 하태후라는 후견인이 존재하였으며 이미 나이가 많아 [[동탁]]이 권력을 휘두르는 데 방해가 되었으므로 [[동탁]]은 황제의 폐위를 획책하였는데 이로 인해 원소는 [[동탁]]과 심하게 반목하였다. 후한서에 의하면 이때 원소는 폐제를 획책하는 [[동탁]]을 준엄하게 꾸짖었으나 [[동탁]]은 칼을 어루만지며 "내가 하고자 하는데 안 되는 게 무엇이냐. 감히 애송이 녀석이 내가 하는 일을 막고자 하는가!"라고 말하며 원소를 협박하였다. 이에 원소가 "천하에 힘있는 자가 어찌 동공 뿐이겠습니까!"라고 분연히 말하며 칼을 뽑아든 채로 인사하고 나가버려<ref>〈원소전〉“〈《獻帝春秋》曰:[...] 卓謂紹曰:「豎子!天下事豈不決我?我今為之,誰敢不從?爾謂董卓刀為不利乎!」紹曰:「天下健者,豈唯董公?」引佩刀橫揖而出。”</ref> 좌중을 놀라게 하였다. 곧바로 원소는 인수(印綬)를 낙양의 성문에 걸어놓고는 그대로 낙양을 떠나 발해(渤海)로 갔다. [[동탁]]은 본래 원소를 죽이려 하였으나, 조정에 원소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자 마침내 회유책을 써서 원소를 발해태수(勃海太守)로 임명하였다.<ref>〈원소전〉 [...] 卓以為然,乃拜紹勃海太守,封邟鄉侯。</ref> 동탁은 하태후를 죽였다.([[189년]] [[9월 30일]]/[[음력 9월 3일]])<ref>《[[후한서]]》 〈[[:s:zh:後漢書/卷9|제9권]]〉 “丙子,董卓殺皇太后何氏。”</ref>
 
=== 반동탁연합의 맹주 ===
===반동탁연합===
[[초평]](初平) 원년([[190년|190]]), 원소는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해 맹주로 추대되었다. 그 해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長安)으로 천도했으며(4월 9일/음력 2월 17일)<ref>《[[후한서]]》 〈[[:s:zh:後漢書/卷9|제9권]]〉 “初平元年[...]二月[...]丁亥,遷都長安。”</ref>, 유폐되어 있던 [[후한 소제 (13대)|홍농왕]](弘農王)을 죽였다(3월 26일/음력 2월 3일).<ref>《[[후한서]]》 〈[[:s:zh:後漢書/卷9|제9권]]〉 “初平元年春正月[...]癸酉,董卓殺弘農王。”</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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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은 제후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음수 (후한)|음수]](陰脩) · [[한융]](韓融) · [[호모반]](胡母班) · [[오수 (후한)|오수]](吳脩) · [[왕괴]](王瑰) 등을 각지에 사자로 보냈다. 원소는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에게 음수와 오수를 죽이게 하였고<ref>〈원소전〉“卓遣執金吾胡母班、將作大匠吳脩齎詔書喻紹,紹使河內太守王匡殺之。”</ref>, 오직 한융만 명성과 덕망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헌제기: 군벌화와 하북 통일===
===군벌로서의 활약===
초평 2년([[191년|191]]), [[공손찬]]이 [[동탁]] 토벌을 명분으로 [[한복 (후한)|한복]]이 지배하는 기주를 침공해 [[한복 (후한)|한복]]을 격파했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이었던 [[한복 (후한)|한복]]에게 부득이하게 종속되어 견제, 감시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나 배후에서 [[공손찬]]의 기주 공격을 조장한 흑막의 장본인이기도 했다. [[한복 (후한)|한복]]이 패배하여 지배력이 약해진 틈을 타 영내에선 반란이 일어났고, 흑산적(黑山賊) [[장연 (평북장군)|장연]]을 비롯해 [[어부라]](於夫羅)·[[장양 (치숙)|장양]](張楊) 등의 군벌이 기주를 넘보았는데 원소는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패퇴한 [[장양 (치숙)|장양]]·[[어부라]]는 원소에게 항복했다. 이로 인해 기주 내에서 위세를 얻은 원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복 (후한)|한복]]을 설득하며 또한 협박했다. 겁에 질린 [[한복 (후한)|한복]]은 결국 원소에게 기주목의 자리를 양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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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대장군 취임을 놓고 벌어진 원소와 [[조조]]의 알력싸움은 원소의 승리라는 형태로 끝이 났고, 헌제라는 새로운 명분 아래의 1인자도 원소가 차지하는 듯 보였지만 양자의 충돌은 이미 시간 문제가 되어 있었다.
 
===후계자 선정과선정 저수와의 대립문제===
원소의 장남 [[원담]]은 사치스럽고 교만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원소는 이 무렵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도 고심하고 있었다.
원소는 막내아들 [[원상 (후한)|원상]]의 용모와 재능을 아꼈으나 [[원상 (후한)|원상]]은 나이가 너무 어려 후계자로 삼기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총애를 받던 후처 유부인은 미소년이었던 [[원상 (후한)|원상]]을 심하게 편애하여 그를 강하게 지지했으며 원소 또한 [[원상 (후한)|원상]]을 총애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원상 (후한)|원상]]이 장성하면 후계자로 삼기로 결심하고 [[원담]]을 형의 양자로 입적시켜 자신의 호적에서 폐출시켰으며 청주의 도독으로 삼아 내보냈다. [[저수]](沮授)는 이에 대해 간언하지만 원소는 오히려 "다른 자식들도 각 주로 내보내 그 역량을 살펴보겠다"라고 말하며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