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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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군 (작위)|군(君)]]
|별칭 = 아명(兒名)은 '''이수신'''('''李守愼''')
|본명 = 이온 <br /> 李縕
|출생일 = {{출생일|1720|11|26}}
|출생지 = [[조선]] [[한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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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조|정조]]가 [[은신군]]을 [[연령군]]의 봉사손으로 정했지만 확실한 계통정리를 하지 않았다. [[조선 순조|순조]] 때 낙천군을 파양하여 본가로 돌려보내느냐, 그냥 두느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1819년]] 당시까지의 선원보에는 연령군의 양자로 낙천군이 등재되어 있었다.<ref name="yigsa">"영중추부사 이시수 등이 왕세자의 관례에 대하여 의논하다", 순조실록 22권 1819년(순조 19년, 청 嘉慶 24년) 1월 24일 정사 1번째기사</ref>
 
그러나 낙천군이 생전에 [[연령군]]의 양자로 입양된 것과,<ref name="yigsa"/> 연령군의 양자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 등이 감안되어 낙천군을 파양하느냐에 대한 의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명확한 답변을 내리기 곤란했던 [[조선 순조|순조]]는 일단 보류로 두라고 하였다.
 
낙천군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논란은 [[조선 정조|정조]] 때부터 [[조선 순조|순조]] 때인 [[1819년]](순조 19) [[1월]]까지 문제가 되었지만, 그뒤 철종, 고종 때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중 왕실의 가까운 근친 관련 부분을 대량으로 인멸, 세초해서 누군가에 의해 어떤 논의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1819년]]까지의 [[조선]] 왕실 족보 [[선원보략]]에는 낙천군이 연령군의 양자로 등재되었다. 그런데 1901년과 1907년의 선원보략에는 낙천군이 생부 [[경창군]]파인 생부 이채의 아래에 등재되었다. 이때 낙천군을 파양하여 본가로 돌려보낸다면, 낙천군이 연령군에게 입양된 뒤에 삼촌 이박의 아들들 중 한명으로 이채의 양자가 되어 살다가 이미 죽은 이유복(李有福)은 또 어떻게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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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선군]] 이영도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뒤에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 [[은신군]]이 낙천군의 제사 모시기를 주저했다는 견해가 있으나 은신군은 사후 연령군의 봉사손이 되었으므로, 확인된 바는 없다.
 
우선 낙천군 내외의 생일, 기일 제사는 [[남연군]] 가문에서 일단 받들었다. 또한 낙천군의 묘 또한 남연군의 후손들이 벌초하고 돌보았다. 우선 [[1819년]](순조 19) [[1월]] 낙천군 제사 받드는 것에 관한 문제가 나왔을 때는 낙천군이 연령군의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남연군과는 인연이 있다<ref name="yigsa"/> 고 보았다.
 
남연군의 후손들은 남연군 후손들의 묘비문이나 신도비 등을 쓸 때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의 후손임을 강조했었다. [[남연군]]의 후손들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왕실 직계와 더 가까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장조|장조]]의 후손임을 강조하다가 20세기 이후에 [[연령군]]과 낙천군을 가계상 선조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