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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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가가 매우 극도로 부정적이었으나,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당대 퍼져 있던 그녀에 대한 평판의 대부분이 과장된 것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 프랑스의 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합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잇고 있다.<ref name="평가">《세계사를 움직인 100인》,청아출판사. p447</ref>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왕비들은 거의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을 이유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폄하하는 것 역시 지나치다고 보고있다.<ref name="평가"/>
 
1793년 [[로베스피에르]]의‘[[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으며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참혹하게 꺾인 인물은 ‘[[베르사유의 장미]]’였다'로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혁명세력은 그녀를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로베스피에르]]는 그녀가 만족할 줄 모르는 ‘자궁의 충동’을 갖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남성 공화주의자들은 왕비의 부정한 사례를 들어 여성의 정치참여를 도덕적 타락으로 몰고 갔다. 미국의 여성 사학자 린 헌트는 “그것은 남성끼리의 새판 짜기였다. 남성 중심의 혁명, 여성을 정치에서 배제한 절반의 혁명. 이것이 프랑스 혁명에 감추어진 보수성”이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223203|제목=1793년 루이 16세 단두대에 서다|출판사=동아일보|날짜=2004-01-20 }}</ref>
 
당시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앙숙관계였고, 두 국가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많은 아들과 형제들을 잃었으며 국민 대부분이 [[오스트리아 대공국|오스트리아]]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나라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로 왔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라는 죄를 뒤집어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