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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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인천부 (1896년)|인천부]]
| 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부]](중구 내륙부, 동구 일대), [[부천군]](나머지)
| 인천광역시 [[중구 (인천광역시)|중구]], [[동구 (인천광역시)|동구]], [[남구 (인천광역시)미추홀구|남구]], [[부평구]]([[십정동]]), [[남동구]], [[연수구]], [[옹진군 (인천광역시)|옹진군]]([[덕적면]])<br> 경기도 [[시흥시]](북부), [[부천시]](계수동, 옥길동), [[광명시]](옥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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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부평도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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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점기 인천의 주요 수출품은 쌀이었으며 이 때문에 정미소와 같은 산업이 발달하였다. 1906년 미곡중계업을 위한 근업소(勤業所)가 인천부 율목리(오늘날 중구 율목동)에 생기자 부산지역에서 올라온 영남상인들이 미곡 상권을 잡았다. 이들은 일찍부터 일본과 거래하여 일본어에 능통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미곡중계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율목동은 기와집이 즐비한 부촌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일본인들이 모여살던 옛 일본 조계지의 일본식 가옥과 대조를 이루었다.<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186-187}} (상권)</ref> 한편 개항기부터 있던 미곡 거래소인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는 1939년 폐쇄되었다.<ref>{{harvnb|이회한|2008|p=202-203}}</ref> 근업소는 한국인 지주와 일본인 수입상 양쪽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중계소였고 인천항의 쌀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일제가 전국에 조선미곡창을 설치하여 중계인 없는 직수출을 시작하고 1935년 곡물검사제를 실시하여 근업소를 규제하기 시작하자 근업소는 몰락하게 되었다.<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190-191}} (상권)</ref> 인천의 정미소와 쌀수출업은 일제가 조선의 쌀을 전략적으로 수탈하였기에 생겨난 기생적 산업이라 할 수 있다. 1921년에는 전국 쌀 생산량 1,400만 섬 가운데 3백만 섬이, 1928년에는 1,700만 섬 가운데 7백만 섬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 때문에 쌀 생산량은 늘었어도 오히려 소비할 수 있는 양은 더 줄어들 게 되었다. 대신 조선은 만주의 조와 동남아시아의 [[인디카 쌀|안남미]]를 수입하여 식량으로 사용하였다.<ref>송건호, 송건호 전집 03 《한국현대사 1》, 한길사, 2002년, {{ISBN|8935655031}}, 158쪽</ref>
 
1930년 이른바 [[만주 사변]]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반도의 산업 정책을 재편하여 공업화를 추진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천은 송림동, 창영동, 도원동 서쪽의 항만지대에 한정된 6.05km05&nbsp;km<sup>2</sup>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부평군과 통합되어 부천군이 되었으나 공업화 추징으로 관할지가 확대되게 되었다. 1940년 2차 관할구역 확장 결과 인천은 부평군의 대부분을 흡수하여 그 면적이 165.82km82&nbsp;km<sup>2</sup>에 달하게 된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6|p=9-10}}</ref> 일제는 인천의 공업화를 위해 전력수급계획을 마련하였고 군수 물자로 사용하기 위한 방적산업을 집중 육성하였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6|p=11}}</ref> 1934년 인천시 만석동에 동양방적주식회사가 인천공장이 세워졌다. 일제시대부터 운영되던 이 공장은 1955년 민영으로 넘겨져 동일방직 주식회사가 되었고 1970년대 가혹한 노동탄압으로 세상에 알려졌다.<ref>{{harvnb|경인일보 특별취재팀|2001|p=264-267}} (상권)</ref><ref>한상철, 《내가 쓰는 한국 근현대사》, 우리교육, 2011년, {{ISBN|8980409400}}, 280쪽</ref>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제는 부평에 일본육군조병창을 세웠다. 1930년~40년대 사이 인천공업지대에 건설된 주요 공장들은 동양방적, 조선목재, 일본제분 등 3개 공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수산업에 속하는 공장들이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6|p=12}}</ref> 1940년대 당시 인천에는 섬유공업 4 개소, 기계금속공업 26 개소, 화학공업 3 개소, 제재업 6 개소, 식료품 공업 47 개소, 기타제조업 51개소 등 137 개의 공장이 있었다.<ref>{{harvnb|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2006|p=115-1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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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역시 확장을 계속하여 1960년 복선화가 되었고 1974년 전철화되어 서울지하철 1호선에 연결되었다.<ref name="고종석" /> 오늘날 경인선은 도시의 확대로 지하화가 추진 중이다.<ref>[http://www.bucheon.go.kr/site/homepage/menu/viewMenu?menuid=001006006011 경인선지하화추진사업], 부천시청</ref> [[경인고속도로]]는 1967년 착공하여 1969년 인천항에서 [[가좌 나들목]] 구간이 개통되었다. 경인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과 인천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한결 가깝게 되었다.<ref>진인혜, 《축제 정책과 지역 현황》, 연세대학교출판부, 2006년, {{ISBN|8971417234}}, 113-114쪽</ref> 서울과 인천 사이의 교통망 확충으로 인천은 서울과 기능적 통합을 이루게 되었고 시가지 확대로 서울-부천-인천이 연속적인 시가지를 구성하게 되었다. 인천의 도시성장 방향은 서울 및 주변도시와 연계되는 고속도로∙산업도로, 그리고 전철노선을 따라 인구가 집중되었다.<ref>{{harvnb|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p=253}}</ref> 1999년에는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되었다.<ref>[http://www.itrailnews.co.kr/news/article.html?no=9367 인천도시철도 개통 14주년], 인터넷레일뉴스, 2013년 10월 23일</ref>
 
[[인천국제공항]]은 1992년 공사가 시작되어 2001년 1단계 공사 준공을 하였다. 인천공항은 개항 원년인 2001년 공항 이용객수가 1,454만명에 불과했지만 이후 연평균 6.4%의 성장세를 보였다. 2014년 8월 누적 여객수 4억명을 돌파하였다.<ref>[http://www.traveltimes.co.kr/bbs/board.php?bo_table=News&wr_id=90637 인천국제공항 누적여객 4억명 돌파], 여행신문, 2014년 9월 1일</ref> 인천국제공항과 인천을 연결하기 위해 총 연장 4,420m의 [[영종대교]]<ref>[http://211.195.163.22/chiefgonjong2/02_airport01.htm#a 영종대교],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ref> 와 총 길이 21.38km38&nbsp;km(다리 길이 12.34km34&nbsp;km)의 [[인천대교]]<ref>[http://bizn.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0910060400285&code=920100&med=khan 인천대교 16일 개통… 차량 통행은 19일부터], 경향신문, 2009년 10월 6일</ref> 가 세워졌다.
 
강화도에는 1970년 갑곶과 문수산성 사이에 [[강화대교]]가 놓였다.<ref>[http://www.ganghwado.com/JiRi/GangHwaDaeGyo/index.html 강화도의 관문 강화대교], ganghwado.com</ref> 차량 통행이 크게 늘자 1994년 제2강화 대교인 [[강화초지대교]]가 착공되었다. 민자유치사업으로 진행된 초지대교는 중도에 건설사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ref>[http://www.kimpo.com/news/articleView.html?idxno=19133 김포 대명-강화 초지 강화2대교 , 2003년 완공], 김포뉴스, 1999년 6월 4일</ref> 2002년 8월 개통되었다.<ref>[http://www.kimpo.com/news/articleView.html?idxno=29370 강화초지대교 개통], 김포뉴스, 2002년 8월 30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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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성장에 따라 인천시는 1981년 인천직할시로 승격되었다.<ref> [http://www.law.go.kr/법령/대구직할시및인천직할시설치에관한법률/(03424,19810413) 법률 제3424호] 대구직할시 및 인천광역시설치에 관한 법률. (1981년 4월 13일 공포.) </ref> 1989년에는 김포군 계양면과 옹진군 영종도가 인천에 편입되었다.<ref>[http://www.law.go.kr/법령/부산직할시강서구설치및시·도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법률/(04051,19881231) 법률 제4051호] 부산광역시 강서구 설치 및 시·도의 관할 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 (1988년 12월 31일 공포.) </ref> 1995년에는 지방자치법 개정에 따라 인천광역시로 이름이 바뀌었으며<ref>[http://www.law.go.kr/법령/지방자치법/(04789,19941220) 법률 제4789호] 지방자치법. (1994년 12월 20일 공포.) </ref>, 경기도 관할이던 강화군과 옹진군 및 김포군 검단면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ref>[http://www.law.go.kr/법령/서울특별시광진구등9개자치구설치및특별시·광역시·도간관할구역변경등에관한법률/(04802,19941222) 법률 제4802호] 서울특별시광진구등9개자치구설치및특별시·광역시·도간관할구역변경등에관한법률. (1994년 12월 20일 공포.)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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