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헌황귀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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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을미사변|아관파천}}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실종되자 그는 고종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하여 그 공으로 [[지밀상궁]]이 되었다.<ref name="ipsisi"/>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었으며, [[명성황후]] 생전인 [[1885년]] 31세에32세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발각되면서 궁궐에서 쫓겨났다.
 
[[명성황후]]에 의해 대궐에서 쫓겨날 당시 엄귀비는 [[상궁]]직을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게 하였으나 당시 대신 [[윤용선]]이 고종에게 간곡하게 말하여 서인만은 면하게 되었다.<ref name="ipsisi"/> 후에 엄귀비는 윤용선의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다가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계비를 간택할 때 윤용선의 손녀를 추천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이후 다시 입궐하여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 [[1897년]] 황자 은(垠, [[의민태자]])을 낳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다.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진봉되었고, 나중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