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정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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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정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5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97_040_0466}}</ref>
 
하지만 윗글은 단순히 설화로 보이며, 대한민국의 성씨는 고려시대 중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대중화 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성씨가 있던 양반의 비율은, 조선초기 10%이하 ~ 조선후기 50%이하이며 , 따라서 성씨가 없던 50~60%의 노비천민들은, 일제시대 1909년 일본의 성씨 부여 정책, 즉 민족법 시행으로 , 노비천민들도 마음대로 원하는 성씨와 본관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비천민들은 족보에 올릴 조상들이 없었으니 , 생각해낸게 설화를 그럴싸하게 만들거나, 과거 중국의 유명인물이나 한반도에서 유명한 인물들을 끌어다가 , 자기족보에 선착순으로 올려서 성씨와 본관을 이어붙이는 행위가 성행하였고 , 이러한 족보세탁 작업중에 조상이 서로 겹치는 웃지못할 경우가 많아 , 어쩔 수 없이 생면부지의 사람(노비천민들끼리)들끼리 족보를 합쳐서 같은집안으로 만들어버리는 , 합본행위도 성행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조선시대 사이에 만들어진 성씨들만 진짜 양반성씨라고 볼 수 있다. 왜냐면 고려왕건이나 조선왕조의 허락없이는, 함부로 성씨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