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카베 모리치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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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소카베 모리치카
|원어이름 = 長宗我部 盛親
|그림 = File:Chōsokabe Morichika.jpg
|그림 크기 = 400px
|그림설명 = 교토 렌코지(蓮光寺) 소장 조소카베 모토치카 상(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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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흐름의 한편으로 가독상속의 경위에 이상성이 있었기 때문인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및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모리치카를 조소카베 씨 당주로써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무가관위(武家官位)를 중요시했던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묘 및 그 후계자들에게 일정한 관위를 수여했는데 모리치카에게는 관위를 수여했다는 기록이 없어서 공식적으로는 그의 통칭인 「우에몬노타로」(右衛門太郎) 그대로였다(비공식적으로만 「도사노카미」土佐守을 칭했을 뿐). 이는 다이묘 당주로써는 이상한 부분이었다. 게이초 4년(1599년) 5월、아버지 모토치카가 사망하고 가독을 이어 도사의 국주(国主)가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모리치카의 조소카베 씨 가독과 도사 국주의 계승은 도요토미 정권으로부터 승인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서 이와 같은 이상한 상황은 이듬해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이어진다. 이에 대해 게이초 2년(1597년) 모리치카가 단독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알하였다는 점을 들어 이 시점에서 차기 당주로써 승인되었던 것은 아닐까 주장하는 설도 있다.
 
[[파일:Site of Chōsokabe Morichika's Position.jpg|200px|섬네일|오른쪽|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모리치카가 진을 쳤던 장소]]
[[파일:Chosokabe Morichika Banner and Battle Standard.jpg|200px|섬네일|오른쪽|조소카베 군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용했던 깃발 그림]]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조소카베 씨가 서군에 가담하는 것은 모토치카 생전부터 마스다 나가모리나 가키미 카즈나오(垣見一直)와의 연 때문이라고 보이며 참전 동기도 당주로써 도요토미 정권의 편을 들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고성전승기』(古城伝承記)에 따르면 모리치카는 당초에는 동군에 붙을 것을 결정하고 다케치 신자에몬(十市新左衛門) ・ 마치사부로 우에몬(町三郎右衛門) 두 사람을 이에야스에게 사자로 보내려 했지만 [[오미국오미 국]](近江国) 미즈구치(水口)에서 서군에게 길이 막혀 서군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하나, 사학자 야마모토 다케시(山本大)는 모리치카와 마스다 나가모리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 이야기의 진위는 의심스럽다고 주장하였다.
 
모리치카는 동군에 가담했던 [[후시미성후시미 성]](伏見城)이나 [[쓰성|아노쓰성]]아노쓰 성(安濃津城) 등을 함락시키고 세키가하라로 향했고,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 ・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 [[나쓰카 마사이에]](長束正家) 등과 함께 이에야스의 본진 배후인 난구 산(南宮山)에 포진하였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내응한 깃카와 히로이에에 의해 모리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고 모리 부대의 후방에 포진해 있던 나쓰카 부대나 조소카베 부대도 모리 부대의 동향을 알지 못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최종적으로 전투에 참가하지도 못한 채 서군은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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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군이 궤멸되자 모리치카는 서군의 궤멸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로부터 전해들었고, 요시다 시게토시(吉田重年)의 정찰로 확인하였다. 모리치카는 이케다 데루마사(池田輝政)의 군이나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의 군의 추격으로 다라오 산(多羅尾山)으로 달아나 이가(伊賀) 방면으로 이즈미(和泉)로 달아났고, 고이데 요시치카(小出吉親)의 추격으로 [[오사카]](大坂)의 덴만(天満)으로 빠져서 도사로 돌아왔다.
=== 개역 그리고 칩거 ===
모리치카는 친분이 있던 도쿠가와 씨의 중신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사죄하였다고 하지만 『도사 이야기』(土佐物語) 등에서는 개역의 원인에 대해 모리치카가 가신 히사타케 치카나오(久武親直)의 참언을 듣고 형 쓰노 치카타다를 살해하였기에 이에 진노한 이에야스가 모리치카의 영토를 몰수하고 개역시켜버렸다고 되어 있다.
 
다만 이이 나오마사의 서장에 따르면 모리치카는 도사를 몰수당한 대신에 「어감인분」(御堪忍分)이라는 형태로 대신할 영지를 수여받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모리치카의 교토 상경은 거기에 응한 것이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접수 때에 구니가 옮겨지게 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가신이나 기라(吉良) ・ 쓰노 등의 유신(遺臣)들이 구니를 근거로 우라도 잇큐(浦戸一揆)를 일으켰고, 그 책임을 물어 「어감인분」 지급을 취소하고 개역에 이르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한편으로 쓰노 치카타다 살해의 시비에 대해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이 사건 자체가 개역의 원인은 아니었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다이묘 집안으로써 조소카베 집안은 이때에 멸망하고, 조소카베 가신단은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불려가 기용된 자나 로닌(浪人)이 된 자, 도로 백성으로 돌아간 자도 있는 등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로닌이 된 모리치카는 게이초 6년에 오사카에서 후시미로 이주해서 다이묘로 복귀하기 위한 운동을 게이초 10년까지 이어나갔다. 게이초 15년에는 삭발하고 大岩祐夢라 칭하고 옛 신하들의 돈으로 살았다고 하며, 데라코야(寺子屋)의 스승을 하며 살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1차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게이초 17년경에는 교토의 가미타치우리(上立売)에 있는 야나기가즈시(柳ヶ逗子)에서 살고 있었다. 또한 기요하라 히데카타(清原秀賢)와 교우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어찌 되었든 반도쿠가와파 위험인물로써 지목된 조소카베 모리치카는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 ・ 가타쿠라 가쓰시게(板倉勝重)의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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