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카베 모리치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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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ite of Chōsokabe Morichika's Position.jpg|200px|섬네일|오른쪽|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모리치카가 진을 쳤던 장소]]
[[파일:Chosokabe Morichika Banner and Battle Standard.jpg|200px150px|섬네일|오른쪽|조소카베 군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용했던 깃발 그림]]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조소카베 씨가 서군에 가담하는 것은 모토치카 생전부터 마스다 나가모리나 [[가키미 가즈나오]](垣見一直)와의 연 때문이라고 보이며 참전 동기도 당주로써 도요토미 정권의 편을 들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고성전승기』(古城伝承記)에 따르면 모리치카는 당초에는 동군에 붙을 것을 결정하고 다케치 신자에몬(十市新左衛門) ・ 마치사부로 우에몬(町三郎右衛門) 두 사람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자로 보내려 했지만 [[오미 국]](近江国) 미즈구치(水口)에서 서군에게 길이 막혀 서군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하나, 사학자 [[야마모토 다케시]](山本大)는 모리치카와 마스다 나가모리의 관계를 생각할 때 이 이야기의 진위는 의심스럽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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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오사카 전투가 시작되고 농성전이 된 [[오사카 겨울 전투|겨울 전투]]에서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 [[기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 고토 모토쓰구 등과 함께 하치조메구치(八丁目口) ・ 다니마치구치(谷町口)에 포진하고 사나다 노부시게가 쌓은 [[사나다마루]]의 지원 거점를 맡았다. 12월 4일에 [[사나다마루 전투]](真田丸の戦い)가 시작되고 성안의 화약고가 폭발하는 사고가 벌어졌고, [[난조 모토타다]](南条元忠)는 이를 배반의 신호로 착각하고 몰려왔다가 [[이이 나오타카]] ・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1595년)|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에 응전해 손해를 입히고 퇴각시켰다. 그러나 그밖에는 대규모의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고 전황은 교착 상태에 놓인 채 오사카 측과 에도 막부 사이의 화의가 성립되었다.
 
[[파일:ChOsokabe Morichika Banner; Natsuka Masaie (1562?-1600) Banner.jpg|100px150px|섬네일|오른쪽|조소카베 모토치카가 오사카 전투에서 사용한 깃발 그림. ]]
야전이었던 [[오사카 여름 전투|여름 전투]]에서는 기무라 시게나리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진을 공격하고자 5천여 주력 군세를 거느리고 출진했고, 도쿠가와측의 [[도도 다카토라]] 부대와 격돌하였다([[야오·와카에 전투]], 八尾・若江の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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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소카베 모리치카의 최후 ===
[[파일:Renkoji (Kyoto), sanmon.jpg|200px150px|섬네일|오른쪽|교토 시 시모쿄 구에 있는 렌코지(蓮光寺). 조소카베 모리치카의 목을 장사지낸 곳이다.]]
5월 11일에 교토 하치만(八幡, 지금의 일본 [[교토 부]] 하치만 시八幡市) 부근의 하시모토(橋本) 인근 갈대밭에 숨어 있던 모리치카는 하치스카 요시시게(蜂須賀至鎮)의 가신 나가사카 사부로사에몬(長坂三郎左衛門)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후시미로 호송되었다. 그 뒤 모리치카는 교토의 대로변에서 조리돌림당하고 5월 15일에 교토 로쿠조 강변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41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