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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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센 공작 ====
[[파일:Quedlinburg Rathaus Heinrich.jpg|thumb섬네일|left왼쪽|180px|하인리히 1세 프레스코화<br/>(독일 들린부르크 수도원)]]
[[912년]] [[11월 30일]] 그의 아버지 오토가 죽자 영지인 작센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주변의 프랑켄 공작령과 수시로 충돌하였다. 그는 자신의 영지인 [[작센]]의 도시 정비와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치중하였다. 아버지 오토가 소유하던 클로스터 평신도 수도원의 원장직을 이으려 했지만 클로스터 수도원장 직은 913년 2월 8일에 [[콘라두스 1세]]가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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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군주 ===
==== 독일 군주로 즉위 ====
[[파일:Siegel Heinrich I Posse.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하인리히 1세의 동전 (927년)]]
 
그가 정식 독일의 군주로 즉위한 것은 [[919년]] [[5월 6일]]이었다. 그 날 프랑켄과 작센의 국경인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회의에서 하인리히는 정식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그를 선출한 제후들은 [[선제후]]가 되었으며, 이후 독일에서 왕을 선출하거나 형식적으로 선출할 때 선제후들이 참여하도록 정착되었다. 이어 후대에 가서 선제후에 보헤미아 공작 등이 추가되었다. 이때 [[볼테르]]에 의하면 그가 즉위하기 전 자신의 손에 올라온 [[매]]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새사냥꾼 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는 전설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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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족과의 전쟁 ===
[[파일:Heinrich-der-finkler-darbringung-der-kaiserkrone.jpg|thumb섬네일|right오른쪽|200px|하인리히 1세의 사냥을 묘사한 그림]]
 
==== 서프랑크 왕국, 로타링기아와의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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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왕권은 불안정했고, 동시에 이민족의 공격과 약탈이 계속되었다. 아들 [[오토 1세 (신성 로마 제국)|오토 1세]]와 [[잉글랜드]]의 에디트의 결혼식을 계기로, [[930년]] 하인리히 1세는 오토의 결혼식을 마친 뒤 [[아헨]]에서 오토가 자신의 적법한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동시에 [[프랑켄]] 공작을 비롯한 각처의 귀족들에게 동의하도록 설득하였다.
 
932년부터 마자르 족이 지도자 볼레스쿠(Bulcsú)와 하르카(harka)의 지도 하에 다시 영토를 침략하였다. 933년에 와서 하인리히는 9년의 협정 종료를 이유로 마자르 족에게 더이상 공물을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마자르 족은 다시 동프랑크로 쳐들어왔고, 하인리히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독일 왕국을 침략한 마자르 족을 상대하여 운스타트 강변을 따라 [[튀링겐]] 북부 지역 일대에서 마자르 족을 맞서 싸웠다.
 
[[933년]] [[3월 15일]]에 [[리아드 전투]]에서 [[마자르 족]]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리아드에서 승리를 거둔 하인리히는 933년 [[헝가리]]까지 내려가 헝가리 북부에서 마자르 족을 크게 부수고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그는 독일 동부 지역을 침략한 [[슬라브 족]]을 [[엘베 강]]변 및 기타 지역에서 격파하였다. 곧 그는 귀족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이것은 그의 대에 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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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독일왕]]
[[분류:독일의 로마 가톨릭교도]]
[[분류:10세기 유럽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