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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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왕 즉위 ==
[[1458년]] [[2월 27일]] 보헤미아의 사회 계급 지도자들은 이르지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추대했다.
후스주의를 추구하는 이르지의 등장은 후스주의 2세대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인바. 2세대 후스주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공존의 시기로서 이르지는 평화와 질서를 표방하면서 두 종파간의 화합을 모색하였다. 교황파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그의 온건한 정책을 높이 평가했으며 외국인 지배자를 싫어하는 민중의 감정을 고려하는 등 이르지에게 투표했다. 이르지는 프라하 협정에 따른 온건한 통치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부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렇지만 이르지와 적대 관계에 있던 [[교황 비오 2세]]는 포데브라트 가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후스전쟁]]의 종전을 선언한 1436년의 이흘라바 협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1462년]] 이르지는 교황청에 대항하여 현재의 [[유럽 연합]]과 같은 유럽의 단일 기구를 수립하는 유럽 군주들의 '평화 연맹'을 제안했다. 이르지의 제안은 오늘날의 [[유엔]]과 [[유럽 연합]]의 선구로 평가받고 있다.이르지의 제안에 따르면 보헤미아를 포함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주권자들과 제후들이 [[기독교]] 세계의 동맹 관계를 수립하고 나중에 [[스페인]]이 추가로 합류하는 방식이었다. 이르지의 제안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적인 성격("유럽"이라고 명시하지 않았음)이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끔찍한 터키인"([[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이르지는 특사를 파견해 유럽 국가들의 궁정에 특사를 파견하여 조약의 취지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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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지는 교황파 출신 귀족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다. [[1465년]] [[11월 28일]] 교황파 출신 가톨릭 귀족들은 젤레나호라(Zelená Hora)에서 이르지 국왕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결성 당시부터 [[교황 바오로 2세]]의 지지를 받았다. [[1466년]] [[12월 23일]] [[교황 바오로 2세]]는 이르지 국왕을 [[파문]]하고 보헤미아의 국왕에서 폐위되었음을 선언했다. 과거 이르지와 동맹 관계를 맺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 헝가리의 국왕인 [[마차시 1세]]가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에 가세했다. [[마차시 1세]]는 1469년 2월의 전쟁에서 이르지 왕에게 포위되어 이르지 왕에게 협조할 것을 맹세하고 풀려났으나 그는 이를 지키기는커녕 [[1469년]] [[5월 3일]]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아 [[올로모우츠]]에서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곧 루사티아, 실레시아, 그리고 대부분의 모라바 가톨릭교도들이 [[마차시 1세]]를 지지하고 나섰다.
 
== 죽음과 그 이 후 ==
[[1470년]] 이르지는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국왕 [[마차시 1세]]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으며 [[1471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울라슬로 2세]](블라디슬라프 2세)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하였지만, 교황청을 비롯해 루사티아, 실레시아, 모라바 지역은 물론이고 보헤미아 왕국 내의 가톨릭교도들 대부분이 [[마차시 1세]]를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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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후스파 기독교인]]
[[분류:로마 가톨릭교회에서 파문된 사람]]
[[분류:15세기 유럽의 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