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Neobot (토론 | 기여)
잔글 2018-06-22 Sangjinhwa의 요청, replaced: 부친 → 아버지, 모친 → 어머니, |본명 → |휘 using AWB
Choboty (토론 | 기여)
잔글 영어판 분류 정보를 이용.+분류:기원전 4세기 통치자; 예쁘게 바꿈
65번째 줄:
처음 현안은 다음 왕을 누구로 할 것인가였다. [[멜레아그로스]]와 보병 장교들은 [[필리포스 2세]]의 사생아, 즉 대왕의 이복 동생이었던 [[아리다이오스|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를 옹립할 것을 주장했지만,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1왕비의 자식이 태어나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결국 [[록사네]]는 아들을 낳았고 양측의 입장을 절충하여 [[아리다이오스]]와 갓난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각각 [[필리포스 3세]](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와 [[알렉산드로스 4세]]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필리포스 3세는 간질 환자였고, 알렉산드로스 4세는 갓난아이였기에 페르디카스가 왕국 [[섭정]]이 되고 멜레아그로스가 그를 보좌하기로 했다. 하지만 페르디카스는 곧 멜레아그로스를 암살하고 전권을 차지했다.
 
== 바빌론 회의 ==
권력을 잡은 페르디카스는 [[바빌론 회의|바빌론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장군들에게 제국 각지의 [[사트라프]] 자리를 분배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때 [[이집트]]를 받아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에우메네스]]를 제외한 모든 유력 장군들이 마케도니아인이었으로 마케도니아의 향방이 중요해졌는데, 마케도니아는 최고참인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가 공동 통치하기로 했다. 마침 알렉산드로스의 부고를 틈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폴리스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두 장군이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에게 참패했는데, 이를 〈[[라미아 전쟁]]〉이라고 한다.
 
최고 지위를 차지한 [[페르디카스]]는 권력욕이 심해져 아내와 이혼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누이였던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하려고 했는데, 그 이혼당한 아내가 [[안티파트로스]]의 딸이었으므로 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와 [[크라테로스]], [[안티고노스]], [[프톨레마이오스]]가 남몰래 손잡고 페르디카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 디아도코이 전쟁 ==
[[기원전 320년]] 프톨레마이오스의 군대가 대왕의 관을 마케도니아 아이가이(Aigai)의 왕실 묘지로 운구하던 페르디카스 측 군대를 습격하여 관을 탈취하면서 양측의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었다. 통합된 제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에우메네스]]가 페르디카스의 명에 따라 반란자들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공동 섭정 [[크라테로스]]와 싸워 전사시켰지만,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던 페르디카스가 갑작스레 암살되면서 전면전으로 비화하지는 않았다.
 
==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 ==
이후 〈[[트리파라데이소스 협정]]〉을 통해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다. 새 섭정은 [[안티파트로스]]가 되었으며 두 왕([[필리포스 3세]]와 [[알렉산드로스 4세]])는 마케도니아로 이송되었다. [[사트라프]] 자리도 재분배되었는데, [[리시마코스]]가 [[트라키아]]를 받았고 페르디카스 암살에 일조한 [[셀레우코스]]가 [[바빌론]]을 받았다.
 
113번째 줄:
[[분류:디아도코이]]
[[분류: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
[[분류:기원전 4세기 통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