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단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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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6월 20일]]에 [[즈리 성]] 총독 [[유록]]으로부터 [[톈진]]의 의화단이 3만명 가까이 모여 [[교회]]를 불태우고 서양인을 죽이려 하는데 이를 평정하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이들을 달래자고 건의하였다. 이 사실은 [[서태후]]를 크게 고무시켰고 [[의화단]] 즉 민심을 이용하여 열강을 막아내 청조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판단, 수구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열강에 대한 선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결국, [[6월 21일]]에 [[선전포고]] 조서를 내려 30여년 이래 서양 열강이 저지른 좋지 않았던 일들을 통박하면서 베이징 공사관을 포위하였다. 여기에 가담한 것은 [[의화단]] 이외에도 동복상이 이끄는 '무위후군'(감군, 甘軍)과 8기 자제로 조직된 무위중군이었다.<ref name="선전포고"/> 의화단은 청 관군과 합류하였고, 이들 의화단 무리들은 청 장군 [[동복상]]이 지휘하는 감군(甘軍)과 함께 [[베이징]] 외국인 지구 공사관과 [[베이징]] 천주교회를 공격했다. 외국인 공사관 소속 외국인 473명, 군인 451명, 중국인 기독교도 3000여명이 2만여 명의 의화단과 청조에 저항하여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ref name="선전포고"/><ref name="독일 ZDF제작, 의화단 전쟁5"/>
 
총리아문은 베이징 주재 11개국 공사에게 안전을 위하여 24시간 이내에 [[톈진]]으로 갈 것을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공사들은 조속히 베이징을 떠나자는 데 의견을 모았으나 독일공사 [[클레멘스 폰 케텔러]]([[:de:Clemens von Ketteler|Clemens von Ketteler]]) 남작은 반대하고 총리아문에 항의하러가다가 숭문문 앞 큰길에서 청군과 의화단에 의하여 살해되었다.<ref name="선전포고"/> [[베이징]] 거리 곳곳에서는 '양인(洋人) 1명을 죽인 자는 은 50냥, 양녀(洋女)를 죽인 자는 은 40냥, 아이를 죽인 자는 30냥의 현상금을 건다.'는 내용의 벽보가 나돌았고, 폭동과 테러가 난무하는 수라장이 되었다.<ref>《이야기 중국사3》,청아출판사</ref>
 
=== [[베이징]] 외국인 지구 포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