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조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태그: m 모바일 웹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60번째 줄:
=== 생애 초반 ===
==== 출생과 세자 책봉 ====
[[파일:Korea-Yeongjo-King of Joseon-c1.jpg|thumb섬네일|right|150px|부왕 [[조선 영조|영조]]]]
사도세자 이선은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조선 영조|영조]]의 서장자(차남) [[영빈 이씨]](暎嬪 李氏)의 소생으로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이복 형인 [[조선 진종|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그는 생후 1년만에 원자(元子) 정호를 받았다. 그가 태어날 때 부왕 [[조선 영조|영조]]는 친히 어머니 [[영빈 이씨|영빈]]의 출산 장면을 지켜보았다.
 
79번째 줄:
=== 대리청정 기간 ===
==== [[대리청정]] ====
[[파일:사도세자 영서.jpg|thumb섬네일|right|170px|대리청정 시절 내린 영서(교지)]]
 
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세손이 태어난 해 영조가 병석에 눕자 사도세자는 부왕 [[조선 영조|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세자는 [[노론]]의 의견을 일방 듣지 않고 [[소론]]도 일부 등용하였다. [[이인좌의 난]]과 관련하여 소론 온건파 [[이광좌]] 등의 처벌, 추탈을 요구했지만 세자는 거절하였다. 노론은 영조에게 세자가 잘못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고해바쳤다.
85번째 줄:
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ref name="daum1"/>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ref name="daum1"/>{{출처|날짜=2014-02-26}}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여러 지방의 환곡에 대하여 덜어내고 더 받는 등 형편에 따라 세금을 조정하여 백성들의 짐을 경감시켜 주었고, 가난한 평민들을 괴롭히는 대동(大同)·군포(軍布)의 대전(代錢)·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ref name="daum1"/> 이런 선정으로 [[충청남도]] [[아산시|아산군]] [[온양시|온양]]의 온양 행궁 때는 백성들로부터 열의와 같은 환호를 받았으며 이때는 도성에 있는 부왕 영조를 그리워하는 편지서찰을 보내기도 했다. <ref>후에 [[이덕일]]은 이런 점을 들어 그가 정신병을 앓았다는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ref>
 
또한 [[소론]] 출신 재상 [[조현명]], [[이종성]] 등은 그를 정치적으로 후원하였고, [[노론]] 중에서도 원칙론자인 [[유척기]], [[이천보]] 등이 그를 지지하였다.
 
==== 영조, 노론과의 심각한 갈등과 정신질환 ====
[[파일:Letter of Crown prince Sado of Joseon.jpg|thumb섬네일|left|150px|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1750년]])]]
[[파일:Crown Prince Sado of Joseon 1.jpg|thumb섬네일|left|150px|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파일:Letter of Crown Prince Sado of Joseon 2.jpg|thumb섬네일|right|170px|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파일:Letter of Crown Prince Sado of Joseon 3.jpg|thumb섬네일|right|170px|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한 편지 사도세자는“내 나이가 금년 15살 봄을 넘긴 지가 오래 됐으나 아직 한 번도 명릉(숙종의 능)에 나아가서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어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표현하기도 했다.<ref name="cho01">[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5/2007061500948.html “울화증 약 몰래 보내주세요…”] 조선일보 2007.06.15</ref> 그는 자신의 후견세력이자 신뢰할 곳으로 처가인 [[홍봉한]]가문을 선택하였다.
114번째 줄:
 
[[노론]]의 대신들 역시 그의 실수와 비행을 영조에게 고해 바쳤다. [[정성왕후]] 생존에는 유화적이었지만, [[정성왕후]]가 죽은 후에는 영조와의 갈등이 더욱 깊어졌다. 세자궁에 있던 관료 조유진은 형수이기도 한 [[효순왕후|효순 현빈]]의 친정 조카였는데 사도세자는 그를 통해 자신의 형수의 동기간인 [[조재호 (조선)|조재호]]와 연결, 서신을 주고받게 된다. [[소론]]계열이었던 [[조재호 (조선)|조재호]]는 정순왕후의 책봉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으로 은퇴하였다가 후에 사도세자의 구원요청을 받고 한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공을 당해 사사된다.
 
한편 사도세자는 영조 즉위의 의리와 명분에 관련된 신임사화에 대해 부왕과는 다른 의견을 내놓아 대립이 심화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이 때 [[김상로]], [[홍계희]], [[문성국]], [[김한구]], [[김귀주]] 등은 그를 수시로 탄핵, 비판하였고, 시댁이 소론 계열이었던 [[화완옹주]] 역시 그를 공격하는데 가담했다고 한다.(하지만 화완옹주가 사도세자를 모함했다는 증거는 명확하지 않아서 추측에 불과하다.) 이에 그를 싫어하는 노론 당원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숙의 문씨 (영조)|숙의 문씨]](淑儀 文氏) 등이 영조에게 세자를 무고하여 영조가 수시로 불러 크게 꾸짖었다 한다.
 
한편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던 [[혜경궁 홍씨]] 역시 세자에 대한 정보를 빼내 [[홍봉한]], [[홍인한]] 등에게 제공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사도세자는 형수인 [[효순왕후|효순현빈 조씨]]의 남동생이자, 영조가 탕평파로서 총해하던 [[조문명]]의 아들 [[조재호 (1702년)|조재호]] 등에게 도움을 청했다.
 
157번째 줄:
 
=== 금기와 복권 ===
[[파일:경모궁의궤향사반차도설.jpg|thumb섬네일|left|150px|사도세자의 사당과 제사를 묘사한 의궤인 [[경모궁의궤향사반차도설]]]]
 
사도세자가 살인을 수시로 한 것은 자신이 직접 반성한 기록이나 죽은 사람들의 이름, 영조의 말 등을 볼 때 일부 사실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