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미소 급행 편집

급행버스 편집

노선
번호
운행구간 경유지 배차
간격
(분)
비고
1100 경주역 감포 신설예정
1150 경주역 양남 문무대왕면(어일) 신설예정
1200 경주역 산대리 우방, 한동아파트 경주시외버스터미널,금장삼성아파트,강동,안강파출소 4.5회 막차(19시 40분)경주역에서 강동 까지 공차 운행
1300 경주역 현곡 푸르지오 건천시장,아화,(경주터널) 신설예정
1600 경주역 부영아파트 이조, 입실,(구)모화역 5회

약력 편집

학력 편집

동호회 약력 편집

  • 이외에 기록은 있지만 비공개 입니다.
  • 2012년 ?월 ?일 ~ 동년 12월 31일 철도 동호회
  • 20??년 ?월 ?일 ~ 2015년 6월 2일 버스 동호회
  • 2018년 9월 27일 ~ 2020년 6월 버.철 동호회
  • 2020년 3월 21일 ~ 동년 9월 2일 휴식
  • 2021년 1월 21일 ~ 2차 동호회 시작중

아프리카TV 약력 편집

  • BJ낭만고양이 (2016年 ?月 ?日 ~ 20년 ?월 ?일)

유튜브 구독 목록 편집

  • 표림
  • 통깡이
  • 이외 다수

보유 서적 편집

(굶은 글씨 중요한 서적 및 소중한 책)

  • 항공의 경종(2010년 복간) 김정렬회고록 (15000원)
  • 정치는 중업이다 이한동회고록 (18000원)
  • 경주읍성과 관부 조철제 (비매품)
  • 國譯 慶州先生案 조철제 (비매품)
  • 일제강점기 그들의 경주 우리의 경주 최부식 (비매품)
  • 박태준 평전 이대환 (32000원)
  • 고려왕릉 장경희(22000원)
  • 신의 정원 조선왕릉 이창환 (30000원)
  • 서간도 시종기 이은숙 회고록(35000원)
  • 신라왕릉연구 이근직 (50000원)
  • 6세기 금석문과 신라 사회 경주문화재연구소(학술자료) (비매품)
  • 열하일기 세트 돌베개 김혈조(84000원)
  • 만화 병자호란 세트 한명기(1권당 16800원 총33600원)
  • 후천성 인권 결핍 사회를 아웃팅당하다 지승호 (16500원)
  • 국역정본 징비록 류성룡(17000원)
  •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 가도이 요시노부(14800원)
  • 국역 동경잡기 조철제 (55000원)
  • 한권으로 읽는 신라.고려.조선.대통령 실록 박영규

(신라 13000원).(고려 12000원).(조선 15000원).(대통령 18000원)

  • 경주민요 경주문화원 (비매품)
  • 광주의 기억을 걷다 노성태(15000원)
  •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안동일(22000원)
  • 일제기 문화재 피해 자료 황수영(30000원)
  • 오버워치 아트북 (33000원)
  • 유홍준의 국보순례 유홍준(15000원)
  • 6 25전쟁 1129일 이중근 (비매품)
  • 대한민국의 위대한 만남 박정희와 박태준 이대환(17000원)
  • 우리땅 독도를 만나다 동북아역사재단 (9000원)
  • 대고려 그찬란한 도전 전시 도록 국립중앙박물관 (42000원)
  • 아픔이 길이 되려면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18000원
  • 일본인도 모르는 자위대 오동룡 (16800원)
  • 이외 다수 서적 보류

회고록 3권 소개 편집

항공의 경종 지은이 김정렬 편집

  • 회고록 3권 소유 중 에서 먼저 항공의 경종 부터 이야기 해보자.
  • 먼저 항공의 경종은 우리나라 초대 공군참모총이자 국방장관 지낸 김정렬 장군이 쓰셨다.
  • 비록 미완성 회고록이지만 공군을 자부심을 가질수있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책은 처음에 1993년에 비매품 한정으로 나왔다가 한국전쟁 60주년(2010년)이 되는해때 마지막으로 복간하였다.
  • 이 또한 복간되자 마자 바로 품절되었다고한다.
  • 또한 이 항공의 경종은 가장 구하기 어렵고 중고 장터에는 84000원 판매한다.
  • 물론 나는 포항 영풍문고에서 겨우 구했다 즉 15000원 주고 구입했다.
  • 그때 나는 기뻐서 한말이 없다 이 얼머나 기쁜일인지는 참아 이루어 말을 할수없드라.
  • 항공의 경종 대해서는 궁금하시면 중고장터에서 구하시길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서간도 시종기 지은이 이은숙 편집

  • 회고록 3권 소유 중 에서 2번째로 서간도 시종기 이야기 해보자.

정치는 중업이다 지은이 이한동 편집

  • 회고록 3권 소유 중 에서 마지막으로 정치는 중업이다 이야기 해보자.

좋아하는 지역 편집

좋아하는 명승지.관광지 편집

좋아하는 나라 편집

  • 일본- 도쿄 나라 오사카 후쿠오카 오키나와 히로시마
  • 독일-

사극 덕후 편집

  • 무신 mbc
  • 불멸의 이순신 kbs1
  • 대조영 kbs1
  • 연개소문 sbs
  • 무인시대 kbs1
  • 서울1945 kbs1
  • 대왕세종 kbs2
  • 장영실 kbs1
  • 천추태후 kbs2
  • 용의 눈물 kbs1
  • 정도전 kbs1
  • 신돈 mbc
  • 일본 nhk대하드라마(2016년~ 現)

정치 드라마 편집

  • 영웅시대 mbc
  • 불꽃속으로 tv조선

경주읍성 남문 징례문 (고도남루)상량문(전극항 문서 가져옴 한때 비로그인으로 작정한거임 그리고 전극항 문서는 내가 만든거고) 편집

짓노니,
붉은 이끼와 푸른 선태의 황폐한 성곽에 보름달 같은 모형은 남았고
푸른 기와와 붉은 난간의 웅장한 건물은 구름에 닿은 형세로 솟았다.
비록 다시,
재고 헤아려도[2] 오묘한 방도는 견줄 수가 없고
길고 짧음은 비교해도 기이한 규모는 측정할 수 없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고
귀신의 도옴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 석탈해왕의 방가이고
실제 박혁거세의 건국이다.
언덕 위에서 한 번 바라보니 용이 꿈틀거리고 호랑이가 웅크린 여러 봉우리고
마을 밖의 세 갈레 길은 개가 짖고 닭이 우는 밀접한 네 방위의 지경이다.
당나라 문물 상황은 배수의 지도[3]로 알 수있고
초나라 산천 형제는 굴원의 시부[4]가 남아 있다.
경애왕의 황음한 즐거움의 있었고
진지왕의 부강한 다스림을 펼쳤다.
철봉이 용마루에 이으니, 선각은 삼하[5]의 물가에 포옹한 듯하고
옥규가 낙수를 받으니, 주궁이 구락[6]의 근처에 비껴선 듯하다.
번성하고 화려했을 때 마음껏 구경할 곳이지만
과분하여 넘치면 바로 화를 불러들일 터이다.
염량이 뒤바뀌자 포석정의 성상은 얼머나 흘렀으며
초목이 쓸쓸하니 계림의 문물은 한 번의 꿈이련다.
한나라 통소와 북은 흐르는 물속에 잠겼고
진나라 옷과 갓은 옛 언덕이 되어버렸다.[7]
옛 서라벌의 넓은 영토가
지금은 대도로의 진관이 되었다.
지금 경주읍성 남문 누각은
아마 옛 신라의 유적지이며
어느 해 지었던 것을까?
이 남루는,
곁에 잘린 골짜기와 이어졌고
세로로 긴 들넠을 누른 듯하다.
누각의 통로는 세 번 쉬어야 하나 은은하게 성벽이 우뚝솟았고
성내의 길은 사방에서 모여 편편한데 벼슬아치가 서로 뒤따른다.
이곳은 영남의 요충지며
진실로 강남의 절경이다.
임천에는 동산의 꽃과 오솔길 대나무의 집들을 합쳐 놓았고
도서는 언덕의 지초와 물가 난초의 여기저기를 둘러있다.
신령스러운 터를 독점하여 빼어나자 명승지의 으뜸이 되었으니
어찌 여러 신선의 뜰에 군자가 스스로 즐기는 선경이 아닌가.[8]
그러나 금창과 쇠 말이 서로 싸우니 전란의 비운을 만났고
잘린 이빨과 문신 이마에 약탈의 흉한 변을 당했다.[9]
아름다운 민가는 화염에 따라 모두 붉게 타버렸고
수놓은 듯한 누각은 차가운 잿더미 되어 모두 검구나.
슬픈 가을에 나그네 되었으니 어디서 두보의 시[10]를 옮으며
한가한 날 시름을 잊으려니 어디서 왕찬의 부[11]를 지울 것인가?
국가는 개구리가 성내자 수레의 가로 막대기에 기대었고
양유 잃어버리고 나너 우리를 고치는 격이 되었다.
국토를 개척하자 대황은 현수의 높은 비석[12]에 의존하고
성곽을 높이니 보장은 진양의 훌륭한 선정[13]에 웅거한다.
순찰사 오공[14]
막중한 지방관의 임무를 띠고
문무의 재주를 아울러 갖칐다.
왕명을 받들어 감당을 교화하자 소백[15]의 순행을 노래하고
무더위를 떨치며 고류에서 지휘하니 조공의 덕치를 칭송한다.
더구나 군사를 진열하며 정비하니 대장기와 둑 깃발 세운 병영이고
책략을 세우고 모색하니 나무로 깎아 활을 쏘는 사대이다.
훈련하고 또 연마하며 다섯 번 거듭[16] 하고 아홉 번 정벌한 병사이고
성을 쌓고 견고히 구축하니 백 번 이기고 만 번 안전케 한 계책이다.
가군[17]이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였다.
파릉의 태수가 되어 악양루를 중수한 등자경[18]이고,
관사를 개수하니 회우정의 가문을 지은 소자첨이다.
천 칸의 넒은 집은 여러 벗들과 함께 즐기는 대청으로 생각하고
아홉 길의 높은 집에서 무슨 마음으로 홀로 향락을 누르겠는가?
통판 이공은, 농서의 명문이며 이씨 문벌의 후손이다.
변방의 황룡이 지금 원비장군으로 태어났으며
서울의 백옥이 일찍이 사신의 문장으로 이름났다.
공적이 반자에 깊으니 자취는 왕희지의 지정과 같고
의지로 삼성을 쌓으니 기운은 진등의 호해와 같구나.
모두
육증한 기둥과 화려한 두공은 비바람의 재해를 피할 게고
넓은 도강과 높은 누대는 바로 고명하신 자리라 일컫는다.
그러므로 청련거사의 소원은 이미 세 번 오르는 것에 조화하였고
자부 신군의 일은 어찌 두 번 드는 거믈 끼려하겠는가?
하물며, 왕공은 험준한 곳에다 항상 예상치 못한 일에 대비를 생각하고
장사는 군사를 거느리고 반드시 걱정이 없는 데를 막어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민산 깊은 오지의 검문은 만 명의 군사를 막아내고
진나라 큰 도읍의 함곡관은 천하에 견고한 관문이었다.
어찌 지난 날 훌룡한 사람을 떠라 거듭 기이한 공적을 거두지 않으랴.
이에, 사간에서 옛 제도를 찾아내고 대장에서 앞의 법도를 살폈다.
용성의 역법으로 기둥을 세우자 택일의 의당함을 알았고
영장이 도구로써 제목을 고르니 바람이 생기는 정교함을 바쳤다.
높은 데로 인하여 낮은 곳을 등지자 이날 높이 솟을 성곽을 바라보고
옛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니 당시 보잘것없는 성벽을 비웃는다.
계층 난간에 눈발이 희물아 병예의 궁전에 비껴 통하고
채색 헌함에 바람이 일자 비렴의 통로를 바로 막는구나.
겹 문을 두들겨 치자 도리어 설령이 멀리 걸렸는가를 의심했고
백 자의 높은 누각에 다시 유주가 올려다 보이는가를 의아해했다.
흰빛 마름과 붉은 여뀌는 여동빈의 즐거움을 이루었고
가을 물과 높은 하늘이 어찌 왕발의 뛰어난 경치뿐이겠는가?
귀와 눈이 치달려 듣고 보는 기쁨을 더하고
몸과 마음을 놓으며 답답한 심사를 씻는다.
애오라지 좋은 송축 노래를 지어
아름다운 생각을 널리 퍼뜨린다.
들보를 동쪽에 길어라
만 리 넒은 바다가 한 눈에 바라보인다.
신라가 강성했을 때를 생각할 제
해신이 어전에 나타나 덩실 춤은 추었다.
들보를 서쪽에 걸어라
단석산 봉우리에 봄날이 저문다.
황량한 김유신의 무덤이 어디 있는가?
잡초 속에 문자 없는 깨진 비편이 있구나.
들보를 남쪽에 걸어라
까마득히 높은 금오산은 푸르기 쪽빛이다.
지금 최치원의 유적이 완연히 남아 있지만
옛 상서장을 바라보니 감회를 어찌 견디랴.
들보를 북쪽으로 걸어라
멀리 높이 하늘이 구름 기운이 어둡구나.
외로운 신하가 연군하는 마음을 알려면
여러 별들이 북극 향해 있음을 보시오.
들보를 위에 걸어라
바람 맑고 달 밝음이 얼마였던가?
학창의 의미가 어쩌면 그렇게 청량한가.
들보를 아래에 걸어라
홀로 창가에 기대어 큰 들녘을 내려다본다.
망망란 우주의 허다한 사람들중에
진정 남자가 누군지 알지 못하겠구나.
바라건대 상량한 후에
하늘은 맑고 땅은 평온하며
가정은 넉넉하고 사람은 흡족하여.
술 한 독으로 문장을 담소하면 대부 사마상여 이고
밤늦도록 풍류로써 가무를 즐기언 종사 두목 이구나.
서천의 절도사 무술 연방장에 용검의 빛이 있고
남국의 아름다운 사람 자리에 연루의 한이 없구나.
도성 사람들이 거듭 감상할 때 계서의 맹세를 찾고
시골 나그네가 자주 머물러 간혹 어초의 흥취를 상기한다.
사계절에 시원함이 불어오고
천리의 긴 화포를 쏟아내었다.

여담 편집

  • 또한 위키백과 경주읍성 문서도 대부분 이자가 한거다.
  • 전극항 문서는 그때 회원가입을 못해서 비로그인으로 만들었다.

집경전 문서 역사 악역(?) 편집

  • 또한 여기서 한가지 가르쳐주는데 집경전 문서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그것 또한 회원가입을 못해서 비로그인으로 만들었지만 이게 헛수고가 되었다고 하고싶군아. 내가 무슨 없는 역사를 만들어다 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큰 오산이란다. 내가 소개해줄 책있는데 한번 읽어보시요. 또 한 2018년 4월 11일에 경주문화원에서 발간한 경주읍성과 관부 읽어보시길 시중에 판매하는 책은 또 다른 경주이야기를 읽어 보면되겠군아 그것도 없다면 조선왕조실록 중 문종.세종.세조.선조.인조.정조실록 읽어보거라 그럼 알게될꺼시다.


沙西 全湜 先生 藥歷 편집

증 좌의정(贈左議政) 사서(沙西) 전공(全公)이 별세한 지 17년이 지난 뒤에 그의 둘째 아들인 전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전극염(全克恬)이 공의 사손(嗣孫)인 전후(全垕)로 하여금 고(故)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황호(黃imagefont)씨가 지은 행장(行狀)을 지니고 상산(商山)으로부터 북쪽으로 1천여 리(里)를 달려와 한양(漢陽)에 있는 나 조경(趙絅)에게 비명(碑銘)을 지어달라고 청하기를, “나의 선인(先人)께서 조정에서 벼슬할 때 집사(執事)에게 사적(私的)인 교분을 얻은 기간이 오래였으니, 이에 감히 선인의 신령(神靈)을 빙자하여 집사께서 불후(不朽)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자리를 떨쳐 예의를 갖추고서 나는 나이가 여든에 가까웠기 때문에 억지로 기운을 내어 글을 짓기가 어렵다고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에 공의 행장(行狀)을 읽다가 절반도 채 읽지 않았을 때 보던 글을 덮고서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내가 일찍이 남쪽 고을의 사우(士友)들에게서 사서공(沙西公)이 세상에 높이 뛰어난 행실이 있다고 칭송하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에 행장을 보니 정말그러하도다. 광해(光海)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을 당하여 소인배들의 패거리가 정인홍(鄭仁弘)을 추대하여 오주(奧主, 영수(領袖))로 삼고서 기세와 기염이 하늘까지 치솟을 정도였으므로 사람들은 감히 그의 콧숨을 거스르지 못하였으니, 부딪치면 부스러지고 접근하면 화상(火傷)을 입는 것은 족히 말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공이 능히 다급한 마음으로 분개(奮慨)하여 입을 엶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변별하여 쓰러뜨리고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을 말함) 상공(相公)의 정론(正論)을 신구(伸救)하였으니, 진 충숙(陳忠肅)이 장돈(章惇)을 반박한 것1)도 이 일에는 미치지 못한다. 요동(遼東) 지역 전체가 오랑캐에게 함락되자 명(明)나라에 가는 길이 변하여 바다를 항해(航海)하게 되었는데, 왕명을 받은 관개(冠蓋, 사행(使行)을 말함)가 전후로 바다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낸 자들이 서로 잇달았다. 그런데, 공은 이때에 나이가 이순(耳順, 60세를 말함)이 넘었는데도 노년(老年)을 이유로 그 일을 마다할 낌새가 전혀 없었고, 앞장서서 젊고 건장한 자를 데리고 출발하여 거대한 파도 지나기를 탁 트인 대로(大路)처럼 여겼으며, 죽고 사는 일을 마치 자기 집에 왕래하는 것과 똑같게 여겼으니, 사 안석(謝安石)이 주즙(舟楫)을 무서워하지 않은 일2)은 오만(敖慢)하여 꼽을 것도 못된다. 이로 말미암아 명나라의 사씨(史氏, 사관(史官)을 말함)가 기록하기를, “조선(朝鮮)의 사신(使臣) 전모(全某)가 내조(來朝)하였다.”고 적었으니, 이는 특별히 기록한 것으로서, 이 일은 이윤경(李潤慶)이 ≪가융록(嘉隆錄)≫에 이름이 오른 뒤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傳)에 이르기를, “죽은 뒤에도 썩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지는 것이 세 가지 있다.3)”고 하였는데, 공의 행실이 어찌 갑자기 공적과 언론에 부끄럽지 않는데 그치겠는가? 태사씨(太史氏)가 장차 대서(大書)하고 특서(特書)할 것이오, 한번 쓰고서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다. 냉담(冷淡)한 창부(傖夫)들의 이야기들이야 어찌 족히 공의 불후(不朽)에 경중(輕重)이 되겠는가.

생각건대, 남의 묘소에 비문을 새기는 일에 내 이름을 의탁(依託)하여 후세에 드리우는 일은 내가 평소에 많이 해왔는데, 대체로 공은 조정에 벼슬한 50여 년 동안에 역임한 관직이 30곳이 더 되며, 관직의 높고 낮음과 내직(內職) 외직(外職)을 막론하고 대부분 공이 일한 바와 말한 바가 모두 가슴속에 쌓아 둔 충직(忠直)을 발현하지 않음이 없어 모두 세상의 준칙(準則)과 세인의 스승이 되기에 충분하니, 남쪽 고을의 사우(士友)들이 일컬은 바 “세상에 높이 뛰어난 행실이 있다.”고 한 것은 단지 그 큰 것만을 말하였을 뿐이다.

공은 아직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선묘조(宣廟朝)의 명상(名相)인 김응남(金應南)이 공을 천거하여 연원 찰방(連源察訪)에 제수되었는데, 역참(驛站)을 온화하게 다스리고 무마(撫摩)하여 피폐했던 우역(郵驛)을 완전하게 회생시켰다. 이에 관찰사가 공을 사무 처리에 재능이 있다고 여기어 가흥창(可興倉)을 위임하자, 세미(稅米)를 거두어 들여 창고에 채워 왜인(倭人)의 경보(警報)가 있다는 이유로 창고의 곡물을 덜어내지 않았으며, 또 주궤(主饋)로 하여금 호서(湖西)의 군향(軍餉)을 지급하게 하니, 군향을 보급하는 일이 제대로 거행되었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 예빈시 직장(禮賓寺直長)에 전임(轉任)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과거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그 무렵에 권력을 장악한 상신(相臣)이 존호(尊號)에 대한 논의를 맨 처음 제창(提倡)하자 삼사(三司)가 덩달아 그 일을 부추겼는데, 공의 의견이 자기들과 다른 것을 미워하였으므로, 공은 마침내 불길한 낌새를 알아채고서 즉시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어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승진하였고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기성(騎省, 병조의 별칭)의 낭관(郎官)에 천거되었으며, 얼마 뒤에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에 임명되어 변방 백성들을 쇄환(刷還)하면서 허위(虛僞)를 적발하여 진적(眞籍)에 귀결시킨 것이 매우 분명하였으며, 또 도신(道臣, 관찰사)을 대신하여 적체된 소송(訴訟)을 판결하였으므로 서안(書案)에 쌓인 문서가 없었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는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정랑(正郞)에 승진하였다. 그 당시에 공의(公議)를 견지하는 자가 있어 공을 선조(選曹, 이조(吏曹))에 두려고 매우 힘을 썼는데, 공에게 당시에 용사(用事)하고 있는 낭관(郎官)을 찾아보도록 넌지시 인도하였다. 그러나 공이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그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는 울산 판관(蔚山判官)에 임명되어 풍화(風化)를 크게 시행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병 때문에 금교 찰방(金郊察訪)에 부임하지 않았으며, 또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는데, 그 당시에 광해(光海)의 정사(政事)가 혼란하여 이륜(彛倫)이 무너지고 있었으므로, 공은 관직에 있는 것이 즐겁지 아니하여 고향에 물러나 숨어사는 듯이 지내면서 정 우복(鄭愚伏, 정경세(鄭經世)를 말함)ㆍ이 창석(李蒼石, 이준(李埈)을 말함)과 더불어 서로 산수(山水) 사이를 유람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상사(商社)의 세 노인(老人)’이라고 일컬었다.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과 이듬해 경신년(庚申年)에 연이어 모친상(母親喪)과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슬픔과 예절을 모두 극진하게 다하였고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상기(喪期)를 마치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여 종묘와 사직을 바로잡은 뒤에, 초야에 있는 현량(賢良)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는데, 이때 공도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임명되어 기주관(記注官)과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얼마 뒤에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수찬(修撰)ㆍ교리(校理)에 임명되었는데, 학사(學士) 임숙영(任叔英)이 항상 칭찬하기를, “오늘날 경연관(經筵官) 중에 고금(古今)에 통달한 사람은 정경세(鄭經世)이고, 사리(事理)에 통달한 사람은 전식(全湜)이다.”고 하였다. 한참 지난 뒤에 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는데, 비리(非理)를 거론하여 탄핵함에 있어 회피(回避)하는 바가 없었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역적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태복시 정(太僕寺正)으로서 피난하는 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천안(天安)에 이르러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은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법에 어긋나게 군대를 시찰(視察)한 죄와 원수(元帥) 장만(張晩)이 공격하는 시기를 늦추어 적들을 놓아준 군율(軍律)을 논죄(論罪)하자, 장만의 막하(幕下)에 있는 무사(武士)들이 모조리 시끄럽게 들고 일어나서 “주장(主將)은 아무 죄가 없는데, 실수한 말을 하고 있다.”고 하므로, 공이 대문(臺門)에 나서서 그들을 꾸짖기를, “종묘와 사직을 몽진(蒙塵)하게 하고 군부(君父)로 하여금 피난을 떠나게 한 것이 누구의 죄이냐? 너희들도 또한 남의 신자(臣子)된 사람들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느냐?”고 하자, 무사들이 모두 혀를 깨물면서 잠잠해졌다.

그해 3월에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거쳐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는데, 이는 임금의 피난길을 따라가 모시느라고 애쓴 공로를 시상(施賞)한 것이었다. 그해 겨울에는 대언(代言, 동부 승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임금이 김공량(金公諒)에게 절충 장군(折衝將軍)의 자급(資級)을 내려주었으나 공이 이를 반려(返戾)하게 하니, 물론(物論, 여론)이 공이 처리를 잘했다고 칭찬하였다.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 좌승지(左承旨)에 옮기었다가 호군(護軍)을 거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개임(改任)되었고, 상개(上价)로서 명나라의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하러 갔는데, 중국 사람들로 보는 자들이 모두 공의 덕기(德器)를 칭송하였으며, 등주 군문(登州軍門) 무지망(武之望)은 더욱 경례(敬禮)를 융숭히 하였다.

이듬해에 돌아와서 임금에게 복명(復命)하였고, 또 그 이듬해인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 2월에 오랑캐가 변경을 침입하여 해서(海西) 지방을 견제하자 장전(帳殿, 임금)이 강도(江都, 강화도)에 들어가 피난하였는데, 오랑캐의 사자(使者)인 유해(劉海)가 오랑캐의 서찰을 가지고 와서 주상(主上)과 더불어 화친의 맹약(盟約)을 맺자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묘당(廟堂)의 논의가 평소의 주장을 꺾고 화친을 하자는 투식(套式) 속으로 들어갔는데, 공은 이에 항소(抗疏)하여 화친하는 일의 시각이 절박하지 않다고 지적(指摘)하였다.

이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개임(改任)되었다가 조금 지나서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여섯 가지 조목에 대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간쟁(諫諍)을 받아들이라는 것과, 치우친 사심을 버리라는 것과, 군정(軍政)을 닦으라는 것과, 군관(軍官)의 수효를 줄이라는 것과,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믿지 말라는 것과, 남의 동정을 기찰(譏察)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군관과 기찰에 관한 일은 대체로 사람들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혼란을 초래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으나, 훈귀(勳貴)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홀로 그 실상을 모조리 진계(陳啓)하면서 털끝만큼도 실상과 어긋나는 부분이 없었으니,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머리털이 쭈뼛쭈뼛 일어설 정도였다.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부터 이듬해인 신미년(辛未年)에 이르기까지 예조 참의(禮曹參議)로 왕래한 것이 네 번이었고, 동전(東銓)과 서전(西銓)의 참의가 된 것이 두 번이었고, 간장(諫長,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된 것이 네 번이었는데, 공은 그때마다 번번이 늙고 매우 병들어서 기력이 오래 조단(朝端, 조정 신하들의 반열)에 끼어있을 수가 없다고 말하며 굳세고 간절하게 외지에 보임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재임하면서 다스린 행정은 그야말로 한(漢)나라 급암(汲黯)이 청정(淸淨)하게 관합(官閤)에 누워 지내면서도 잘 다스린 것4)과 같은 방식을 터득하였으므로 온 경내(境內)가 감화(感化)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게 되자, 고을 백성들이 비석(碑石)을 세워 시(詩)을 새기어서 공의 선정(善政)을 찬미(讚美)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논하기를, “옛날에 우리 선왕(先王)께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드셨는데, 비록 왕자(王子) 대군(大君)일지라도 감히 그 제도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평 대군(麟坪大君)은 혼례(婚禮) 때에 의복과 기용(器用)이 너무나 사치스러웠으니, 아마도 선왕의 제도에 누(累)가 될 듯합니다.”고 하자,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또 기강(紀綱)이 점차 해이되는 것과 궁궐의 숙위(宿衛)가 근엄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논하였고, 또 상소(上疏)하여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인주(人主)의 호오(好惡)며 천재(天災)와 민원(民怨)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꼼꼼하고 치밀하게 지적한 수백 마디의 얘기가 모두 문제의 핵심을 적확(的確)하게 끄집어낸 것들이었다. 또 임금에게 예전에 배운 학문을 더욱 익혀서 다시 새롭게 터득한 것을 보태도록 권유하였으니, 참으로 유신(儒臣)의 말이었다. 이어 사임하자 체직되어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대사간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여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휴가를 내리어 고향에 돌아갔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정월에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상(喪)에 대궐 아래로 달려가 곡(哭)하고 은명(恩命)에 사은(謝恩)한 뒤에 곧장 고향에 돌아갔으며, 이어 대사간(大司諫)ㆍ부제학(副提學)에 임명을 받았으나 모두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그해 12월에 서쪽의 일(西事, 호란(胡亂))이 다급해져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게 되자, 공은 창의(倡義)하여 군사들을 모집하였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에 포위가 풀리어 임금의 어가가 다시 서울에 돌아오자 공은 즉시 대궐에 달려가 안부를 여쭈었는데, 도착하기 전에 벌써 부제학(副題學)에 임명하였으므로 이에 사은 숙배(謝恩肅拜)한 뒤에 청대(請對, 신하가 임금에게 독대(獨對)를 청하는 일)하였는데, 임금께서 공이 앉은 자리로 바짝 다가 앉으시며 하교하기를, “경(卿)이 창의(倡義)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내가 매우 가상(嘉尙)히 여기는 바이다.” 하며 매우 지극하게 위유(慰諭)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영남(嶺南)의 군대가 부래(負來)한 뒤에 재차 집결(集結)한 것은 참으로 영남의 사대부들이 나라가 어려울 때 임금을 뒷전으로 여기지 않는 의리를 아는 자가 많았기 때문이니, 호남(湖南)은 이에 대하여 부끄러운 바가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앞쪽으로 나아가 대답하기를, “이 노신(老臣)이 병이 들어 갑옷을 입고 적들과 싸우지 못하였으니,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죽어야 하는 의리를 저버렸는데, 지금 이렇게 문석(文石)의 섬돌에 올랐으니 얼굴이 열 겹의 철갑(鐵甲)보다 더 두꺼운 셈입니다.”고 하고서, 이어 진언(進言)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큰 어려움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성인(聖人)의 용기’라고 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는 유독 전고(前古)의 제왕들이 나라를 잃었다가 다시 나라를 보존한 것을 살피지 못하셨습니까? 원컨대, 스스로 저상(沮喪, 실의(失意)하여 기운이 꺾임)하지 마시고, 스스로 안일(安逸)하지 마시고, 날마다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흥망 성쇠(興亡盛衰)의 도에 대하여 강구(講究)하시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대체로 임금이 피난하느라고 도성을 나간 뒤부터 전좌(殿坐)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공이 이 일을 언급한 것이었다.

얼마 뒤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고 서너 달이 지난 뒤에 특별히 참판(參判)에 승진하여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자급(資級)에 올랐는데, 공이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휴가를 청원하여 선친(先親)의 묘소를 이장(移葬)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638년 인조 16년)에는 세 번 간장(諫長,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한번 헌장(憲長, 사헌부 대사헌)에 전임(轉任)되었으며, 예조 참판(禮曹參判)ㆍ국자 대성(國子大成, 성균관 대사성)에 개임(改任)되었다. 이때 임금이 호남(湖南)의 군대가 군율(軍律)을 범(犯)하였다는 이유로 남한산성에 가서 석달 동안 복역(服役)하도록 명하였고, 또 순검사(巡檢使)에게 명하여 삼도(三道,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말함)의 주사(舟師, 수군)를 점검하도록 하였는데, 공은 그 일이 모두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 차자(箚子)를 올려 여덟 가지 조목을 논하였는데, 성궁을 조양하라는 것[調養聖躬]과 실덕을 힘써 닦으라는 것[懋修實德]과, 사치하는 풍조를 통렬하게 혁파하라는 것[痛革侈風]과, 언로를 넓게 개방하라는 것[廣開言路]과, 기강을 떨쳐 숙정하라는 것[振肅紀綱]과,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라는 것[崇獎節義]과,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보살펴 주라는 것[勤恤民隱]과, 내수사를 혁파하라는 것[革罷內需]이었으니, 모두가 나라의 병통을 고치는 양육(粱肉)이자 약석(藥石)같은 것들이었으므로, 그 얘기를 들은 식자(識者)들이 탄복(歎服)하였다.

그 뒤 두 해 동안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수장(首長)에 임명된 것이 모두 세 번이었으나 다 사양하였다. 이때에 대신(大臣)이 임금에게 건의(建議)하기를, “전모(全某)는 덕망(德望)이 본래부터 높고 나이가 이미 노년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서둘러서 크게 써야 합니다.”고 하였는데, 공은 그 말을 듣고서 더욱 스스로 겸손하게 처신하며 재능을 감추고 물러났다.

이어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 2월에 임금께서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에 가자(加資)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하고 동지경연 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이는 상신(相臣) 이성구(李聖求)의 계언(啓言)을 따른 것이었다. 공의 나이가 비로소 만80세가 되었으므로 곧이어 대사헌(大司憲)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1월 초7일에 상주(尙州)의 성(城) 밖에 있는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부의(賻儀)와 사제(賜祭)를 정해진 예의(禮儀)대로 내렸으며, 숭정 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追贈)하였다. 그 뒤에 공의 장독(長督, 맏아들)인 전극항(全克恒)이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책훈(策勳)된 까닭에 추은(推恩)하여 공을 좌의정 겸 영경연사 세자부 감춘추관사(左議政兼領經筵事世子傅監春秋館事)에 가증(加贈)하였다. 공이 별세한 지 이듬해 2월에 상주의 치소(治所) 서쪽의 백전산(栢田山)에 있는 선영(先塋) 아래 손좌(巽坐)의 묏자리에 장사지냈는데, 공의 정신이 또렷할 때 자식들에게 분부한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공의 휘(諱)는 식(湜)이고 자(字)는 정원(淨遠)이며 사서(沙西)는 호(號)이다. 선계(先系)는 옥천(沃川)에서 나왔는데, 그 선대(先代)에 전학준(全學浚)이라는 분은 고려조에 벼슬하여 영동정(領同正)을 지냈고, 후대로 전해 내려오다가 태자 중윤(太子中允)을 지낸 전효격(全孝格)과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낸 전대부(全大富)와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전숙(全淑)에 이르러 비로소 세상에 크게 드러나게 되었다. 공의 고조(高祖)는 전응경(全應卿)인데 석성 현감(石城縣監)을 지냈고, 증조(曾祖)는 전팽조(全彭祖)인데 국자감(國子監)의 상상(上庠, 진사(進士)를 말함)이었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대부(大父, 할아버지)는 전혼(全焜)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황고(皇考, 아버지)는 전여림(全汝霖)으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공의 신분이 귀해져서 추은(推恩)한 것이다. 선비(先妣)는 월성 이씨(月城李氏)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참봉(參奉) 이신(李信)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 정월에 태어났는데, 영특하고 탁월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겨우 치아(齒牙)를 갈 무렵이 되었을 때부터 벌써 마을 사람들이 효동(孝童)이라고 칭찬하였다. 열 살이 되지 않았을 때부터 숙사(塾師)에게 나아가 배워 학문이 나날이 향상되었는데, 사담(沙潭) 김홍민(金弘敏)이 평소에 인륜감(人倫鑑, 인물의 장래를 잘 알아보는 식견을 말함)이 있었으므로 공을 보고서 칭찬하며 나중에 크게 될 인재로 기대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는 창의(倡義)하여 군사들을 모집해서 왜적 수십여 명을 찔러 죽였으니, 공이 자기 일신(一身)을 잊고 국난(國難)을 위하여 순절(殉節)하려고 한 뜻은 이 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공은 사람됨이 피부가 희고 키가 컸으며 성품이 온화하고 평이(平易)하여 아량(雅量)이 있었다. 평소에 지킨 것이 오로지 의(義)와 도(道)였으므로 비록 험난(險難)한 일을 겪었더라도 의기(意氣)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한결같이 유지하다가 그 몸을 마치었다. 이러하였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위로는 조정에 벼슬하는 관원으로부터 아래로는 시골 마을의 학구배(學究輩)에 이르기까지 슬퍼하고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또 그가 한 시대에 재상(宰相)이 되어 백성들에게 은택이 돌아가도록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었으니, 공의 덕망(德望)을 이 일에서 알 수가 있다.

아! 공은 나에게 장인(丈人) 뻘이었는데, 공은 나를 대함에 있어 나이가 어리고 많음의 선후(先後)로써 차이를 두지 않았다. 내가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에 일역(日域, 일본)에 사명(使命)을 받들게 되어 덕공(德公)의 침상5)(寢床) 아래에 찾아가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는데, 도리어 영좌(靈座) 아래에 곡(哭)하며 절을 하게 되었으니, 그 슬픔이 어찌 끝날 수 있겠는가?

공은 모두 두 번 장가들었는데, 선부인(先夫人)은 강화 최씨(江華崔氏)로 부사(府使)를 지낸 최거원(崔巨源)의 4세(世) 손녀(孫女)로서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일찍 죽었다. 후부인(後夫人) 홍씨(洪氏)는 남양(南陽)의 세족(世族)으로 사인(士人) 홍천서(洪天敍)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으니, 전극항(全克恒)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내고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나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의 국난(國難)에 죽었고, 전극염(全克恬)은 진사(進士)로서 전 감역(監役)이며, 딸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황덕유(黃德柔)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전극개(全克慨)ㆍ전극항(全克恒)ㆍ전극징(全克憕)ㆍ전극층(全克)이고 딸은 생원(生員) 강유(康鍒)와 유지수(柳之洙)에게 각각 시집갔다. 전극항은 후사(後嗣)가 없고, 서출(庶出)은 전숭(全崈)이다. 전극염은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전학(全嶨)과 전후(全垕)이니, 전후는 전극항의 후사가 된 자이며, 딸은 이확(李曤)ㆍ이채(李埰)ㆍ김학기(金學基)에게 각각 시집갔고, 막내딸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전민(全)은 전극항의 소생이고, 전금(全)은 전극징의 소생이고, 딸은 아직 나이가 어리며, 전부(全峊)는 전극층의 소생이다. 공의 사위인 황덕유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황빈(黃霦)ㆍ황연(黃)ㆍ황정(黃霆)이고, 정언(正言) 홍여하(洪汝河)와 유학(幼學) 성석하(成錫夏)는 그 사위며, 막내 딸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강유(康鍒)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강후학(康後學)과 강만학(康晩學)이고, 딸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홍여하는 자녀(子女)가 있으나 아직 나이가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훌륭하도다 전공(全公)이여! 세상에 짝할 자가 누구인가? 인(仁)을 머리에 얹고 다니었고 의(義)를 가슴에 품고 지냈네. 순탄한 길은 반드시 남에게 양보하였고 병통에 대해서는 반드시 급히 고치려고 하였네. 신중하고 청정(淸淨)함으로써 장수를 누리었고 강경하고 깐깐하면서도 남을 포용하였네. 아! 이와 같은 분을 오늘날에 다시 볼 수가 있으랴?

일본 국무대신 종류 편집

내각법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을 제외하고, 14명 이내의 국무대신을 임명할 수 있으며, 특별히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17명 이내까지 임명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메이커 사단 편집

부대 명칭 (소속) (/)구호 vs라이벌 군단 편집

  • 수도기계화보병사단(제7기동군단 소속)맹호부대/맹호!vs20기계화보병시단
  • 제1보병사단 전진부대/전진!(제1군단 소속)
  • 제2보병사단(제3군단 소속)노도부대/충성!vs제27대보병사단
  • 제3보병사단(제5군단 소속)백골부대/백골!
  • 제5보병사단(제6군단 소속)열쇠부대/단결!
  • 제6보병사단(제5군단 소속)청성부대/청성!/사랑합니다!
  • 제7보병사단(제2군단 소속)칠성부대/단결!
  • 제8기계화보병사단(제7기둥군단 소속)오뚜기부대/돌격!vs제11기계화보병사단
  • 제9보병사단(제1군단 소속)백마부대/백마!

각주 편집

  1. 문서 참고
  2. 규얼은 토규와 수얼인데 해의 그림자나 토지의 넒이 등을 재는 도구다.
  3. 배수는 진나라 하동 사람이다. 조상이 죽은 뒤, 사마씨에 귀의하여 조의를 창안했고, 지방 장관으로 오래 있으면서 우공지역도 18편을 지어 올렸다.
  4. 이는 초나라 굴원이 멱라수 적지에서 지은 《이소경》을 말한다.
  5. 옛날에 당나라 사람은 하동, 은나라 사람은 하내 주나라 사람은 하남에 도읍을 정했는데, 이건이 삼하다. 삼하는 천하의 가운데 있으며 왕이 사는 곳이다 곧 경주를 미칭한 듯하다.
  6. 구락은 구작로 조형된 낙서를 이른 말이나, 여기선 옛 신라 궁성을 지칭한 듯하다.
  7. 이 구절은 신라가 망했다는 의미다.
  8. 경주가 아름다운 길지임을 말한다.
  9. 모두가 임진왜란의 참상을 말한다.
  10. 두보의 시 《등고》 가운데《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란 시구가 있다.
  11. 후한 왕한은 자가 중선 이다. 그의 《등고부》 가운데《登玆樓以四望兮 聊暇日以銷憂》란 구절이 있다.
  12. 진나라 양호는 양양 태수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양호를 추모하기 위해 그가 자주 올랐던 현산에 세운 비석을 현수비 또는 타루비라 한다. 여기서 관찰사나 부윤의 선정을 말한다.
  13. 전국시대 조양자가 윤탁을 시켜 진앙을 잘 다스리게 했다는 것으로, 역시 선정을 말한다.
  14. 당시 순찰사는 오숙이다. 그는 1631년 10월에 도임해서, 이듬해 10월에 임기 만료하고 떠났다. (도선생안)
  15. 주나라 문왕의 아들 소공이 남국을 순행할 때, 팥배나무 아래에서 송사를 잘 처리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의 전정을 사모하여 이 나무를 자르지 않았다는 고사다. 어진 관리의 선정을 이르는 말이다.
  16. 삼령오신의 말로, 군사 전략상 누차 경계함을 이른다.
  17. 가군은 1631년(인조 9年) 12월에 도임하여 1633년(인조 11年) 4월 임기 만료하고 떠났다.
  18. 등자경이 파릉 태수로 좌천되어 동정호 악양루를 중수하였다. 이는 범화문이 지은 악양루기에 나오는 글로 곧 전십이 징례문을 중건한 것을 찬미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