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브라이언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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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은 루이즈 모헌(Louise Mohan)이며, 이후 계부 셰리던 브라이언트(Sheridan Bryant)의 성으로 갈았다. [[네바다주]]의 농촌 지역에서 성장했으며 [[네바다 대학교]]와 [[오리건 대학교]]에서 수학, 1909년 역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언론일에 투신하여 [[오리건주]] [[포틀랜드 (오리건주)|포틀랜드시]] 일대의 신문들에 자유기고가로 활동했다. 포틀랜드시에서 지내는 동안(1909년-1915년) 브라이언트는 [[여성의 선거권|여성선거권 운동]]에 참여했다. 1915년 첫 남편과 이혼하고 리드와 재혼한 뒤 브라이언트는 리드를 따라 [[뉴욕시]] [[그리니치빌리지|그리니치리]]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브라이언트는 당대의 유명 여성주의자들의 모임인 [[헤테로독시]]에 참여해 그 구성원들과 친교를 쌓았다. 1919년 [[국민여성당]]의 [[워싱턴 D.C.]] 행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일간 구류되기도 했다. 이 시기 브라이언트와 리드 부부는 모두 혼외정사를 했고, [[자유연애]] 사상에 따라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브라이언트의 애인으로는 극작가 [[유진 오닐]]과 화가 [[앤드루 다스버그]]가 있었다.
 
1920년 리드가 [[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브라이언트는 러시아, 터키, 헝가리,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과 중동 각지를 다니면서 허스트사에 기고를 계속했다. 이 시기에 쓴 글들을 모아 1923년 『모스크바의 거울들』을 출간했다. 그해 말 외교관 [[윌리엄 크리스티안 불릿 주니어]]와 재혼했고, 그와의 사이에 유일한 자식인 딸 [[앤 모엔 불릿|앤]]을 낳았다. 말년의 브라이언트는 [[동통성 지방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사회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저술이나 출판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술을 많이 마셨다. 불릿은 1930년 브라이언트와브라이언트의 음주벽과 동성애를 이유로 이혼하고 딸의 양육권도 가져갔다. 블라이언트는 1936년 [[파리 (도시)|파리]] [[세브르]]에서 객사했고 [[베르사유|베르사유시]]에 묻혔다. 향년 5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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